/김승호 보령제약그룹회장 자서전/06/어려운 여건 속에 약국의 문을 열고

2015.02.26 08:27:41

"전 재산을 몽땅 투자해서 약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두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밤늦도록 약국 일을 돕다가 빈 그릇들을 머리에 이고 혼자서 집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전 재산이 걸린 보령약국이 하루 빨리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밤늦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령약국을 개업하자마자 나는 초대 관리약사(정재화 : 鄭在和)를 채용하고 그와 단 둘이서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성약국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약사도 아닌 내가 전 재산을 몽땅 투자해서 약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두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런 내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준 것이 바로 아내였다. 우리는 당시 결혼 1년을 갓 넘긴 신혼이었지만 나는 일에 매달려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약국에서 숙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이 식사를 머리에 이고 날라 주기도 하고, 약품이나 장부정리를 도맡아 해주었다. 그런 아내의 아낌없는 내조가 약국 개업 초창기의 내 불안감을 씻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해준 것이다.
개업 당시 전국에는 약종상(藥種商)과 한약종상(漢藥種商), 그리고 이른바 매약상(賣藥商)이 7,000여개 가까이 있었지만, 아직 약국의 수는 1,000여 군데를 갓 넘는 정도였다. 약사의 수에 비해 약국의 수가 턱없이 적다는 것은 당시 약국의 영업실적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약사들 대부분이 개업하기를 꺼렸고, 대신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은 제약업계나 큰 도매상으로 취업을 해 갔다.


이처럼 약사들이 개업을 기피하는 이유는 그만큼 약품의 유통시장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업을 하게 되면 자본을 비롯한 여러 여건상 일개 소매약국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로서는 소매약국이 도매상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희박했다. 도매상들은 대부분 제약회사의 영업을 대신해주고 있던 형편이어서, 이들 도매상들로부터 약품을 재공급 받는 형태의 소매약국들이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당시 의약품 시장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 완제품이나 부정한 경로로 흘러나온 군수품, 아니면 원조 의약품 등이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이들 약품의 대부분은 자금면에서 강점을 지닌 도매상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백광약품을 비롯하여 천도약품, 청계약품, 한양약품, 천양약품, 태평양약품, 종로약품, 한성약품 등이 대표적인 도매상들이었고, 지방에서는 부산의 한일약품 대구의 대구약품, 진주의 보건약품, 광주의 광주약방, 목포의 백제약방, 대전의 삼양약국 등의 위세가 대단했다.


소매약국인 보령약국은 이렇듯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약사출신도 아닌, 그래서 스스로 내세울 재산이라곤 젊은 패기와 성실 하나뿐이던 내가 이 어려운 여건을 뚫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남다른 계획과 전략이 필요했다.
밤늦도록 약국 일을 돕다가 빈 그릇들을 머리에 이고 혼자서 집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전 재산이 걸린 보령약국이 하루 빨리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밤늦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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