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총장 자서전/58/근검절약하신 아버님, 후덕하신 어머님

2012.04.12 13:52:07

저녁밥을 이웃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한끼씩 굶으신 어머님

나의 아버님은 독자이셨는데 큰할아버지 댁에 양자로 가시어 가문을 이루셨다. 그래서 아버님의 생부(生父)이신 작은할아버님은 결국 손이 없게 되셨다. 내 위로는 형님 세 분과 누님 네 분이 계시었다. 어려서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둘째형을 작은할아버지 양손으로 보냈는데 어려서 질병으로 사망, 셋째 명수(明洙) 형이 양손으로 대를 이었다. 그러나 셋째형은 6·25 사변 때 희생되고, 현재는 큰형님의 둘째아들인 용태가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이런 집안 사정 때문에 작은할머님은 당신의 아들을 큰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 항시 못마땅해서 불평을 하셨고 그래서 동서 간에 불화가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님은 부농인데도 사계절 내내 쉴 새 없이 일을 찾아 나섰는데 아마도 내가 그 성격을 닮은 것 같다. 봄, 여름, 가을에는 10여 명의 인부를 데리고 감농(監農)을 하시는 등 농사일로 바쁘셨고 농한기인 겨울철에는 왕골 공예품(돗자리)을 만드시는 한편 일꾼들과 함께 가마니 짜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셨다. 또 당시 농촌에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축산에 손을 댔고 고무신 장사도 하셨는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는 모든 생필품이 통제를 받는 통에 고무신과 운동화는 그야말로 금값이었다.


내가 유년기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선친 덕분이었는데 “못 살면 남한테 깐 보이는 것이여…….” 하시던 아버님이셨다. 아버님은 막내인 나를 더욱 사랑해 주셨다. 가을철이 되어 과일이 익으면 잘 익은 홍시나 큰 알밤을 보자기에 싸서 담임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하시며 마당을 나서는 내 손에 들려주시곤 하셨다.
아버님은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뜻한 일은 끝내 관철시키는 분이셨다.

 

4~5세 때 일로 기억하는데 우리 고향엔 가게도 보면서 돈놀이를 하는 일본 사람이 있어 그 집엘 가신 일이 있다. 아버님은 그 일본사람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말씀을 하시고 언제까지 어떻게 갚겠다고 하자 그 사람이 김 선생은 신용이 바르니 꾸어 주겠다며 즉시 돈을 내주는 걸 보았다. 사람에겐 신용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아버님은 당신의 일만 해도 엄청났지만 동네 사람들의 게으름과 탈선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겨울철 농촌에선 투전(노름)판이 벌어져 농사지은 쌀을 몽땅 털리거나 집까지 날리는 일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그들을 불러 앉혀 놓고는 “처자식이 불쌍하지도 않혀! 미쳤는가?” 라고 호통 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님께서는 항시 새로운 것을 찾아 바쁘게 생활하시면서 면내 지역사업에 앞장섰고, 대소 문중에 도유사(都有司)도 몇 차례 지내시었다. 부모님이 사시던 집은 양촌 도정리에 있던 집을 이전한 것으로 형님이 금마에서 왕래하며 감독을 하셨다. 아버님은 후손 중 고향에 와서 살 사람을 위해 영승재(永承齋)란 현판을 거셨는데 지금은 종중 재실로 되어 있다.


나는 아버님의 성격과 외모는 물론 추진력, 결단력, 판단력 등 당신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유하지만 늘 부지런히 일을 찾아 하시고 근검절약하시는 성품을 어려서부터 보고 배워, 나의 인생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님도 몸을 아끼지 않고 큰살림을 불평 없이 꾸려가셨다. 마치 두 분은 경쟁이라도 하듯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일손을 잡으셨다. 어머님은 후덕하시었고 부지런해서 꼭두새벽 10여 명 일꾼의 식사로부터 가족들의 빨래, 나와 같이 자라던 두 누님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앉아 계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버님이 겨울에 돗자리와 가마니를 짜셨다면 어머니는 행랑 아주머니와 어울려 두부를 만들어 장터에 내가셨고, 봄이 되면 매일 같이 베틀에 올라앉아 길쌈을 하셨다. 당시 농가에서는 양잠을 많이 했는데 밤늦게 누에들에게 뽕잎을 주셨고, 겨울과 이른 봄철에는 밤마다 베틀에 앉아 베를 짜시곤 했다.


그 당시 시골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장작불을 때서 밥도 짓고, 저녁이면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숯불을 넣은 다리미로 밤늦도록 옷을 다리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잘못하여 숯불이 옷에 떨어지면 옷이 타기도 하고 옷이 더러워지면 다시 세탁을 하는데 누구나가 당시는 그렇게 생활했지만 어머님은 유독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더 일하셨다. 아무리 피곤해도 내일 일까지 오늘 처리하시는 부지런한 성품이셔서 사시사철 편히 앉아 계시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에 골몰하시었다. 주위에서는 이런 어머님의 부지런한 성품을 닮아서 내가 병원 운영이나 대학 관리 모두에 철저하다고 말하는데,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남에게 베푸는 일이 많으셨다. 어려운 이웃에게 무엇이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셨다. 당시 보릿고개에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부락 사람이 집에 오면 어머님 몫인 저녁밥이나 점심밥을 먹여 보내는 것을 나는 가끔 보았다. “왜 어머니는 굶으시며 다른 사람에게 밥을 내주느냐”고 여쭸더니 어머님 말씀이 “한 끼 굶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그 사람은 세 끼 굶고 온 사람”이라고 하셨다. 당신의 저녁밥을 이웃사람에게 주고 저녁을 굶는 일도 많으셨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러 번 들었다. 없는 사람을 동정하고 도와주어야 복을 받는다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아버지 죽헌 김영철씨.    

 

          

  어머니 전의 이씨.


어머님께서는 시어머님과 남편에게 정성을 다하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정성을 다하여 할머님을 모시었다. 밥도 항시 솥의 가장 가운데 부분의 것을 먼저 할머님 밥그릇에 담은 뒤 아버님 그릇 순으로 푸시는 효부였다.
뿐만 아니라 자식교육에도 남다른 면이 있어 내가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상대 아이의 집에 찾아가 맞은 아이 부모에게 사과하고 돌아오셔서 조용히 훈계하시던 그런 분이셨다.
 

  
 어머님은 이렇듯 많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틈틈이 자식들 걱정도 유별나셨다. 매형이 만주에 가 있을 때 홀로 3형제를 키우던 둘째누님이 항시 마음에 걸리는 듯 무엇인가 먹을 것이 있으면 인편에 보내 주시곤 했다. 한번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바로 위 누님과 은진 외갓집에 갔다가 누님 댁에 들러 하루 유하고 다음날 집에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비가 연 3일간이나 쏟아졌다. 누님은 식량이 떨어진 듯 이웃집에 가 쌀을 빌려다가 밥을 지었다. 나는 누님댁의 이와 같은 실정을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쌀과 보리를 머슴 편에 보내시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한때 이런 어머님의 사랑을 나는 철없이 귀찮고 창피한 것으로 여긴 적도 있었다. 나는 결혼하여 몇 년을 대전에서 거주했다. 주말에 집에 가면 어머님께서는 몇 개의 주머니 봉투에 당신께서 손수 농사지으신 밤, 콩, 호박꼬지 말린 것, 대추 등을 넣어 주셨다. 동구밖까지 나오시면서 잘 가지고 가라고 당부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버스를 타야 했고,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들고 가려면 힘들다고 짜증스러워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의 이같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가지고 다니기 귀찮은 생각에 마지못해 들고 왔던 것이다. 이제 생각하니 나의 철없던 마음이 한없이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자식에게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주고 싶은 어버이의 마음,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이 그때 그 주머니 속에 가득 차 있었음을 생각하며 새삼 어머니의 정(情)을 기린다.


어머님은 평소 건강하셨다. 명절 때 고향집에 내려가면 체중이 는다는 말씀만 가끔 하셨다. 크게 편찮으신 일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건강검진제가 없을 때라 종합검진 한번 못해 드린 채 갑자기 쓰러지셔서 허겁지겁 달려 내려갔다. 형님 말씀이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라고 했다. 대전에서 오동열 박사를 모시고 와 진료했으나 그도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며 경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3일 만에 눈을 감으셨다. 향년(享年) 72세로 유명을 달리 하신 것이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나의 비통함은 말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극진히 모시지 못한 내 자신이 후회스럽기 한량없다.


18세 때 15세인 아버님과 결혼, 4남 4녀를 기르시고 김씨 가문의 번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어머님은 사리에 명달(明達)하시었다. 정성으로 선조를 받드셨고, 지성으로 어른을 모시었다. 자손들에게 온후(溫厚), 관인(寬仁)하셨으며 외롭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셨던 어머님은 범인의 경지를 넘으신 분으로 내가 살아 숨쉬는 한 그 크신 사랑은 내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은 철저한 가부장제로 아버님 뜻에 누구 하나 반기를 드는 이가 없었으며, 식사 때는 할머님과 아버님이 한 상에 앉으시고 우리 형제들은 어머님과 딴 상을 차렸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당시 농가에선 고등어와 갈치 그리고 이와시(정어리) 자반이면 더 없는 반찬이었는데 우리 집은 항상 그것들을 갈무리해두었다. 생선의 살팍진 부분은 으레 어른 상에 오르고 머리와 꼬리는 막내인 내 차지였다.


할머니에 대해선 어릴 때 일로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게 없는데 업어주시던 기억과 커가면서 어른들 말씀에서 어렴풋이 그때 일들을 연상해 볼 뿐이다.
구한말을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노후에 말끝마다 “고오얀지고!” “말세로고…….”를 연발하시며, 한학을 하신 터라 지기(知己)를 만나면 으레 문자로 대화를 나누셨다고 한다.

 

“어인 일로 머리칼과 턱수염이 희끗희끗 해지셨는가[鬚髮如何白]”, 하고 문안을 하면 “학문을 한답시고 이 꼴이 되었소이다[多因積學勞]” 라며 선비 티를 내세우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장죽(長竹)을 물고 갈지(之)자 걸음에 남의 집 대문 앞에 이르러선 “이리 오너라, 으흠!” 하셨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적 전통을 받드는 보수적인 가문이었지만, 부모님의 엄격한 가르침과 함께 따스한 사랑 속에서 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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