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총장 자서전/59/자애로운 형님과 누님들

2012.04.16 11:24:02

1년에 10여차례 자라던 집에서 자며 머물러



큰 형님인 승수 형님은 나와 18년이라는 연령차가 있어서 부모님과 다름없이 나를 키워주신 분이다. 일제시대 때 공주 이인면의 공의(公醫)로 부임하셨는데 밤에도 몇 번씩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자전거를 타고 10리~20리 길을 마다않고 왕진하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를 형님댁에 기숙시키며 가르치셨으며, 중학, 대학까지 나의 수업료와 잡비를 모두 도와주셨다.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조카 용문, 용목을 키운 아주머님은 신병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중학 시절 나는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도 주말이면 형님댁에 갔으며 세탁물을 아주머님께 부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죄송스럽고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는 이인에서 논산으로 옮겨 개업 중이던 동인의원이 전쟁으로 파손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으셨다. 그러다가 난리 통에 처가가 있는 익산군 금마면에서 ‘금마의원’ 간판을 걸고 재기의 노력을 쏟으셨다. 그곳에서 10여 년간 개업을 하던 중 아주머님이 49세라는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뜨셨다. 그때 나는 미국 유학중이어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귀국 후에 묘소를 찾아 그간 아주머니의 인자하신 보살핌과 은혜에 감사하고 명복을 빌었다.

 

김희수 총장 가족사진.

          
서울 수복 후 사회가 얼마간 안정되자 나를 비롯한 형님 자제(6남매)들이 형님께서 서울로 올라오시기를 간청 드려 서울로 이사하시어 개봉동에 ‘만수의원’을 개원, 은퇴하실 때까지 개업의 생활을 했다.
형님은 고혈압과 당뇨가 있어 스스로 음식을 조심하시며, 약물요법을 많이 썼지만, 1993년 83세로 타계하셨다.

 

건양학원 이사직을 맡아 계셨기 때문에 건양학원장으로 건양중·고 교정에서 영결식을 엄숙히 거행, 부모님 산소 밑에 모셨다. 형님은 독학으로 의학공부를 하신 입지전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을 일으켰고 내가 의대에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신 분이다.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평소 잘 모시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점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둘째형님인 명수 형님은 양촌초등학교를 나온 후 예산농업학교를 거쳐 농협 전신인 금융 조합에 취직하여 논산 근교 노성에서 근무했다. 당시 큰형님도 국가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우리 집안은 한때 축제 분위기였다. 일제하에서 각 시도에 몇 개의 중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시험에 합격하면 집안의 경사였는데 큰형님까지 국가의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니 집안의 기쁨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결혼 생활 1년만에 폐결핵을 앓던 형수님과 사별한 둘째형님은 8ㆍ15광복 후 미군정 후생부에 취직을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세브란스 의대에 다니는 동안 형님댁에서 기숙하며 통학을 했다. 형님댁은 용산구청 가까이 문배동이어서 학교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거리였다. 거의 도보로 통학을 했는데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후에 처남이 된 김종원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면 삼각지에 이르고 철도관사는 거기서 멀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은 재혼하여 1남 3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시다 6ㆍ25전쟁 때 장녀 용순만 남겨 놓고 전 가족이 폭격을 맞아 참사를 당했다. 같은 동네에 살던 형님 동서인 박 선생이 형님 내외분을 가매장해 주어 큰형님과 나는 9ㆍ28 수복 후 둘째형님 내외분을 운구하여 고향 당골 선산에 안장했다.

 

 형님은 이렇듯 30세에 전쟁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는데 장녀 용순이는 고향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내가 대전에 있을 때 대전여고를, 서울 영등포 개업 시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LA에 살고 있다. 아들은 예일대학 의대를 나와 UCLA에서 신경외과를 전공하고 첫째딸도 UCLA를 나왔으며, 둘째딸은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했다.


둘째 형님댁의 비극은 나의 부모님께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가슴 속에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1950년 6월 16일 세브란스 졸업식을 마치고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철도병원 ‘인턴’ 생활까지는 시일이 좀 있어 양촌 집에 다니러 왔다가 6·25를 맞았다. 전쟁의 와중이라 둘째형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인편에 형님의 비보를 듣고 나는 큰형님과 비통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어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아마 이런 것이 동기간의 애정이 아닌가 싶다.


네 분의 누님은 이미 타계하셨다. 나는 지금도 1년이면 10여 차례 부모님이 사시던 양촌에 들러 당골 재실집 사랑채에서 잔다. 유년기를 보낸 고향이어서 옛 추억이 있으려니와 바로 집 뒤에 부모님 산소와 형님 산소가 있어 아침 일찍 참배를 드리며 명복을 빈다. 서울같이 자동차 소리가 없고, 조용한 곳, 공기 맑고 닭 우는 소리, 개구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듣노라면 내 고향이 어느 농촌보다도 좋은 곳임을 새삼 느낀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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