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총장 자서전/60/초등학교 시절―양촌에서 이인으로

2012.04.23 13:50:25

형님 내외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어려움 없이 소학교 졸업



내가 양촌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여덟 살이 되던 1936년이었다. 막내로 집에서 응석이나 부리던 내가 아버님의 손을 잡고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자주 붉히곤 하던 기억이 어제 일인 듯하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행랑채 아주머니가 번갈아 등·하교 길을 같이해 주셨기 때문에 낯설음을 금세 극복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 무렵 형수님이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 그 호칭이 귀에 익었으나 행랑채 아주머니까지 도련님이라 부르는 게 이상했다. 한번은 어머니께 “왜 행랑채 아주머니까지 그리 부르냐” 여쭈었더니 “장차 너는 크게 될 사람이라 그런다”며 웃어 넘기셨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공주 이인(利仁) 형님댁으로 옮길 때까지 유모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이인초등학교 졸업반 사진. 김총장은 이 학교를 나와 공주중학에 입학했다.


소학교 시절 몇 가지 일이 잊혀지질 않는다. 3학년까지 조선어 독본을 배우다 4학년에 올라가면서 그것이 없어지고 일본말을 배워야 했다. ‘한석봉’ 이야기가 ‘수병(水兵)의 모’로. ‘조선동요’가 ‘하이쿠(排句)’로, ‘도공 이삼평(李參平)’이 ‘가키우에몽(枾右衛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군신(君臣-軍神)들 이야기로 교과서를 장식했으며, 일본인 선생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입버릇처럼 외쳐대기 시작했다.


한번은 어머니와 함께 연산역을 지나다가 이민(移民)가는 한 가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일가족인데 갓난아이는 엄마 품에서 젖을 물고 있었고 부인은 간이역 땅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누가 보든 말든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해 남편이 부인을 추스르며 “그만 그치라구!” 소리를 연발하며 외쳤다.“산 입에 설마 거미줄 칠라구. 만주는 땅이 넓어 작대기만 꽂아두 그게 제 땅이랑께…….” 살길이 막막해 만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눈시울을 붉히셨고 몇몇 이웃 사람들도 대책 없이 안쓰럽게 지켜만 보는데 한 여인이 가다 먹으라며 벼 보자기에 싼 것을 손에 쥐어주었다. 밀개떡 정도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그때 목이 쉬도록 왜 그들이 울고 있는지, 그리고 왜 만주로 떠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학교에서 왜 우리 말을 배울 수 없고 일본 역사를 배우며 그들과 한 나라라는 것을 강요당해야 하는지 몰랐다. 너무 어릴 때여서 국가와 역사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다. 


또 한 가지는 1940년 대한발(가뭄) 때 일로 우리 집은 상답(上畓)이 많아 큰 피해는 없었으나 천수답을 짓는 농민들은 하늘만 원망하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비가 올 기미는 전혀 없었고 때를 놓친 농민들은 논에 메밀씨를 뿌렸다. 먹을 양식이 떨어진 농민들은 저수지 공사와 신작로 부역에 나섰는데 품삯은 일본에서 들여온 절간(切干) 고구마가 전부였다.


그 무렵은 농약이 없어서 병충해가 창궐하면 소학교 학생들에게 나방 채취를 지시, 저녁에는 논두렁에 앉아 나방을 잡느라 애를 태웠다.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 놓고 그 위에 석유 등피(램프)를 밝히면 나방 떼가 달려들다 대야 물에 빠진다. 그것을 거둬 학교에 제출하면 마리 수에 따라 성적이 매겨졌다.

 

나무 젓가락으로 송충이를 잡아 제출하기도 했고 퇴비 증산을 한다는 명분 아래 풀단을 짊어지고 등교하기도 했다. 굶어 부항이 난 학생들이 기력을 못차려 출석률이 떨어지자 학교 당국은 부랴부랴 급식을 서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우리나라가 참으로 암울하고 비참한 운명을 맞았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그 고통을 남들보다 적게 겪었으니 다행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무언가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양촌소학교에서 3년을 마치고 1939년 큰형님의 병원인 ‘동인의원(同人醫院)’이 있는 공주 이인소학교로 전학을 했다. 양촌은 지금도 한갓진 시골 마을이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교통의 불편은 물론 모든 시설이 열악한 곳이었다. 부모님 생각에 당시 충청권 최고의 명문인 공주중학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양촌 소학교를 나와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나 자신도 양촌에서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 형님이 계신 공주의 이인 소학교로 전학을 결심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곁은 떠났지만 형님댁에서 형님 내외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어려움 없이 소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특히 몸이 약하셨던 형수님의 보살핌은 남다르셨기에 지금도 타계하신 형님 내외분의 은혜에 항상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다.


방학을 하면 부모님이 계신 양촌으로 달려갔다. 당시 연산까지는 버스가 다녔지만 거기서 양촌은 이십리길을 걸어가야 했다. 부모님은 막내가 객지에서 공부하느라고 고생하고 왔다며 닭을 잡아주시는 등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려고 애를 쓰셨다.

 

집에서 꿈같은 생활을 했다. 개학이 되면 다시 공주로 가야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형님댁에 갖다드리라며 보따리를 여러 개 싸주셔서 이십 리를 걸어가기에는 꽤 무거웠다. 가끔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시면 연산까지 자전거를 태워주셨는데 그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시 한 학급은 60명 정원인데 남학생 44명, 여학생 16명으로 일본인 교장을 비롯해, 전 교사 7명 중 3~4명이 일본인 교사였다. 6학년 때 상급학교 시험 준비는 7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6학년 담임 다까하시(高橋) 선생님의 지도 아래 소위 우수반 13명이 매일 밤 11시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다. 12월 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교장 선생이 알려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해 공주중학교에는 5명이 지원, 3명이 합격했는데 나의 합격은 전적으로 큰형님과 형수님의 덕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껏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인 소학교 4학년 때 만난 안병석 군은 소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이요 죽마지우(竹馬之友)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이인소학교 23회 졸업생으로 몇 년 전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날 20여 명의 동창들이 참석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때문인지 몇 친구는 전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학생도 잘 골려주고 싸움도 잘하던 친구는 바로 기억이 나는데 얌전했던 친구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이인 소학교도 당시의 교사(校舍)는 아주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언덕에 있는 벚꽃나무와 채소밭, 그리고 텅 빈 운동장뿐이었다.


큰형님께서 동인의원을 개업하고 살던 집도 허물어져 없어졌지만 오래된 은행나무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은행나무에는 백로, 황새가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먹이로 물고 온 개구리, 뱀 같은 것의 일부분이 나무 밑에 떨어져 늘 주변이 더럽혀져 있던 기억이 났다. 어렸을 때 뛰놀던 모교 교정과 형님 집이 있었던 동네를 둘러보니 옛날의 추억들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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