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총장 자서전/62/기숙사 생활―혼돈의 시절

2012.04.30 11:34:39

담력훈련, 잊지 못할 추억거리로 남아

시대가 아무리 험난하고 절망적이라 하지만 푸릇푸릇한 젊음을 지닌 청년들에게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낭만과 포부가 있기 마련이다. 당시의 기숙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규율이 엄격하여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즐거움도 있었다.


하급생들은 아침 5시에 기상나팔이 울리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학교 운동장에 나가 점호와 아침체조를 한 다음 상급생의 시중들기에 바빴다. 침구 정리, 방안 청소를 시작으로 실장의 세숫물 준비, 책가방 챙기기 등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다.

 

공주중학교 기숙사 전경.

 

식사 나팔소리와 동시에 재빨리 식당으로 뛰어가는데 그 이유는 배가 고파서이기도 하지만 늦은 학생은 끝번서부터 몇 명을 잘라 오후 수업이 끝난 뒤 기숙사에 돌아와서 변소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기숙사의 식당은 급식량이 부족하여 한창 성장기에 있던 학생들은 늘 배가 고파했다. 이 시기에 태어나 자란 사람들의 대부분이 작은 체격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밤 10시가 되면 복도에 나와 앉아 야간 점호를 받았는데 점호가 끝난 후 잠시 동안 즐거운 오락시간이 허용되었다. 선배들이 노래를 시키면 이 시간에는 유행가도 자유롭게 부를 수 있도록 돼 있어 노래 잘하는 학생들은 유행가를 멋지게 불러서 기숙사생들의 흥을 돋우기도 했다.

 

그것이 끝나면 각자의 방에 들어가 하루 일과를 되새겨보거나 집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에서 때로 엉뚱한 재미를 즐기는 때가 있었다. 대개 비 오거나 비바람 부는 궂은 날 밤중에 참외와 토마토 서리를 나서는데 상급생 명령에 따라 울타리를 넘어 몰래 빠져나가 닥치는 대로 따다가 한자리에 모여 배를 채우던 일은 커다란 즐거움의 하나였다.


1학년 때 일이다. 담력을 길러주는 훈련의 하나로 선배들이 주관하는 행사인데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1학년만 식당에 모아 놓고 귀신이야기 등 그림까지 그려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면서 겁을 잔뜩 준다. 그리하곤 캄캄한 밤중이면 느닷없이 시담(試膽) 훈련을 한다고 신입생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약 2km 거리에 위치한 공동묘지 어느 곳엘 가면 봉분 위에 흰 보자기로 싸 놓은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가져오라든가 묘 위에 설치된 종이에다 도장을 찍고 오라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령왕능이 있는 부근의 공동묘지로 짐작된다.

 

오밤중에 덜덜 떨며 묘지를 살피다가 저쪽 능 뒤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리면 간이 콩알만해져 머리끝이 쭈빗거릴 만큼 무서웠다. 바로 이때 “이놈아, 넌 누구냐?” 하고 3~4명이 우르르 튀어나오는 통에 화들짝 놀래어 달아났는데 알고 보니 선배들의 장난이었다. 이와같은 일들은 기숙사 생활에서 잊지 못할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당시 공주중학의 기숙사 실장은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씨였다. 기숙사를 요(療)라 불렀는데 그때 JP(김종필 씨의 약칭)가 요장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김종필 씨는 공주중학 19회 졸업생으로 나의 1년 선배였다. 어느 날인가 요장실을 청소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책꽂이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우리말은 입도 벙긋 못할 때이니 그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은 모두 일어판이었는데 나쓰메(夏目嗽石)의 소설집, 아쿠다가와(芥川龍之助)의 『거미줄』, 시기(子規) 전집, 괴테의 『파우스트』, 기쿠지(菊池寬)의 연애소설, 『영웅 나폴레옹』, 『소크라테스』, 심지어 히틀러의 『나의 투쟁』까지 눈에 띄었다. 주변에선 그가 사상전집까지 읽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때도 남들의 이목을 끌었던 분이다.


그 무렵엔 소위 불순한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거나 유치장에 구금되는 사건이 간간이 일어났다. 일부 학생이 ‘독서회’를 조직, 불량 서적을 접했다는 것인데 짐작컨대 『막스』나 『엥겔스』 『자본론』 같은 걸 읽다가 들통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어떤 경우는 하숙집에 모여 일인 선생을 배척하자는 모의를 하면서 “일본은 전쟁에서 진다”고 떠드는 걸 순사가 추녀 밑에서 엿듣고 일망타진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일제 때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예외없이 독립 투사나 좌익 계열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소요에 가담했던 학생들은 해방 후 대부분 정치판에 가담했다가 6·25 때 희생당한 이가 많았다. 암울했던 일제 말에도 학생들의 기개는 대단해서 장차 자신은 사상가·외교관·군인·학자가 되겠다고 목청을 높이기 일쑤였는데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공주중학 출신 중에는 정치인·군 장성·실업인·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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