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총장 자서전/66/한국동란의 상처와 구호병원

2012.05.11 09:32:59

전주 구호병원에서 인턴으로 출발

6ㆍ25전쟁의 비극은 우리 동포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뼈저린 한(恨)을 남겨주었다. 우리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형님이 딸 하나를 제외한 전 가족과 함께 폭격으로 참변을 당했다. 나의 바로 위 누님 한 분도 오빠인 용산의 작은 형님댁에 다니러 왔다가 같은 참변을 당했다.

 

훗날에 들은 이야기지만,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사변이 일어나 38선이 무너지고 3~4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는데 아군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연일  남쪽으로 밀리는 형국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전세 속에서 7월 초순경 미군(당시는 유엔군)의 B-29 폭격기가 연일 용산 일대에 많은 폭탄을 투하하여 형님댁이 폭격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김희수 총장이 받은 의사면허증.

 

당시 용산에 한국은행 조폐공장인 정금사가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지폐 조판기를 북한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하기 위해서 무차별 폭격을 가함으로써 인명피해를 더욱 많이 냈다고 했다.
나는 대학 4년 동안 용산의 형님댁에서 기숙을 하며 졸업 때까지 공부를 했다. 형님께서는 지금의 보건복지부에 근무하셨는데 생활이 그리 풍족하지 못하여 형수님께서 구멍가게를 보고 있었다.


나는 동란이 발발하던 그해 6월 17일에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했으며, 용산에 있는 철도병원에 인턴으로 발령 받아 7월 1일부터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졸업식 이튿날인 18일 부모님이 계신 고향 양촌으로 내려갔다. 인턴 근무를 시작하는 날까지 한 열흘 동안 여유가 있기 때문에 고향집 부모님 곁에서 쉬었다가 상경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6월 25일 아침 라디오 뉴스에 38선 부근에서 우리 국군과 이북 괴뢰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새벽에 이북 괴뢰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동안 전세는 심히 불리해져서 적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한다는 소식과 함께 포성이 가까이 들려왔다.

 

나는 서울에 올라갈 생각을 단념하고 불안한 가운데에 고향 양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국군이 어느새 대전, 공주를 넘겨주었다는 소문과 함께 양촌까지 인민군이 들어왔다. 면에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며칠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그야말로 인공(人共) 치하가 된 것이었다.

곧바로 우익 인사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아버지는 지주이자 지역 유지이신 관계로 인민위원회에서 그냥 둘 것 같지 않았으나 피신하지 않고 집에 계셨다. 예상했던 대로 아버지는 며칠 후에 인민위원회에 끌려 가셨다.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따라 나섰지만 별일 없이 다시 돌아오셨다.

 

 평소 누구한테 악한 짓을 하지 않고 후덕하게 살아오신 덕분에 화를 면한 셈이었다. 마침 양촌면 인민위원회 간부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극진히 대해주며 담배도 넣어주고 조사도 간단히 마치게 해주었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군(郡)인민위원회에 넘겨지지 아니하시고 다음 날 집에 오셨다. 그분이 아버지를 잘 봐주셔서 바로 풀려난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그분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그분의 모친이 세상을 뜨셨는데 묘 쓸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나의 산에 묘를 쓰도록 묘지를 제공해 준 일도 있다. 그런데 그분이 논산을 떠나 어디서 살고 있는지 현재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생명을 보호하여 준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6ㆍ25전쟁의 와중에 아버님은 다행히 무사하셨으나 서울의 둘째형님 일가족과 누님의 무참한 희생으로 당시 부모님이 받으신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그 상처는 우리 가족에게 떨쳐버릴 수 없는 크나큰 아픔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9·28 수복이 된 후에도 남쪽 지방에서는 낮에는 미군기가 공격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진군하는 등 주야로 2개 체제의 지배하에 있는 곳이 많았다. 특히 나의 고향 인근에 있는 대둔산이 인민군 패잔병과 인민공화국에 협조한 의용군, 인민위원회 등 많은 좌익분자의 피신처로 이용되면서 대치가 장기화되었고 민간인의 피해도 많았다.

 

이러한 지경이었기에 서울은 특별하게 출입증을 소지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용산 둘째 형님 일가족의 비보를 듣고서도 곧바로 올라가 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올라가보니 내가 살았던 형님댁은 폐허가 되었고 나를 반겨줄 형님 내외분과 조카들은 저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내가 의대 졸업 후 첫 인턴 생활을 하기로 되어 있던 용산 철도병원도 폭격으로 불타 버렸다. 따라서 나의 인턴 생활 꿈도 산산이 깨어져 버린 채 낙향하였다. 얼마 후 10월부터 나는 큰형님이 개업하고 있던 전북 익산에서 가까운 전주 구호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듬해 9월까지 1년간 근무하였다.

 

환자들은 주로 남하하던 피난민들이었고 간혹 국민방위군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입원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전쟁에 시달려 상처 입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의대 졸업 후 나의 인턴 생활은 전진(戰塵) 속에서 이렇게 시작된 셈이었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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