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영칼럼/환자안전은 의료의 기본이다. 그러나 환자안전 정책은 그동안 병원급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설계되고 운영돼 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의원급 의료기관의 환자안전사고 예방 및 대처를 위한 방안」은 이러한 정책의 사각지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국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의원급 의료기관에서도 전체 환자안전사고의 30%가 발생하고 있지만, 정작 안전관리 체계는 의원급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 의원은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 간호조무사 등 소수 인력으로 운영된다. 환자안전 전담부서를 둘 수도 없고, 병원처럼 복잡한 인증체계를 운영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병원급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접근일 수밖에 없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의원급 환자안전사고의 상당수가 개인의 실수보다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다. 약물·주사 관련 사고, 알레르기 병력 확인 누락, 의사소통 오류, 낙상사고 등이 반복되는 이유는 의료인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다 제한된 인력과 시간 속에서 안전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이다.
해외는 '처벌'보다 '학습과 예방'에 집중
영국은 국가보건서비스(NHS)를 중심으로 환자안전사고를 자율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운영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의료인을 처벌하기보다 원인을 분석하고 동일한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의료진이 불이익을 우려하지 않고 사고를 공유하는 '저스트 컬처(Just Culture)'가 환자안전 정책의 핵심이다.
미국도 연방 보건의료연구품질청(AHRQ)을 중심으로 의원급을 포함한 일차의료기관 환자안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약물 확인 체크리스트, 환자 신원 확인, 의사소통 표준화 등 현장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실무 중심의 안전도구를 개발해 보급하고 있으며, 처벌보다 교육과 재발 방지에 정책의 무게를 두고 있다.
호주 역시 소규모 의원의 현실을 고려해 최소한의 인력으로 운영 가능한 표준 절차를 마련하고, 정부와 학회가 교육과 컨설팅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환자안전 수준을 높이고 있다.
일본도 '동네의원' 안전관리 지원에 집중
우리와 의료환경이 가장 비슷한 일본의 접근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후생노동성을 중심으로 의료안전 종합대책을 추진하면서 대형병원뿐 아니라 의원과 진료소까지 환자안전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사회와 각 지역 의사회는 의료사고 사례를 공유하고 안전 매뉴얼과 체크리스트를 보급하는 한편, 회원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환자안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의료인을 일방적으로 처벌하기보다 원인을 분석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의료사고조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사고 원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의료현장에 환류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의원급 의료기관도 이러한 교육과 지원체계 안에서 환자안전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는 의원급 의료기관에 병원 수준의 행정 부담을 요구하기보다 현실에 맞는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하도록 지원하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맞춤형 안전관리'
의료정책연구원이 제안한 내용 역시 이러한 국제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환자 확인 절차, 처방 전 5단계 확인, 주사 전·후 체크리스트, 낙상 위험군 선별, 사고 유형별 대응 프로토콜 등은 추가 인력이나 고가 장비 없이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이다.
무엇보다 의원급 환자안전 정책을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병원과 의원은 규모도, 인력도, 진료 환경도 다르다. 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고 정책 효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진이 안심해야 환자도 안전하다
최근 의료현장은 필수의료 인력 부족과 의료분쟁 증가, 행정 부담 확대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안전까지 규제 중심으로 접근하면 의료진은 방어적 진료에 더욱 몰릴 가능성이 크다.
환자안전은 의료인을 감시하는 정책이 아니라 의료인이 안전하게 진료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이어야 한다. 의료진이 실수를 숨기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 사고를 학습의 기회로 삼는 문화, 의원급 현실에 맞는 지원체계가 갖춰질 때 비로소 환자안전도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의 이번 보고서는 단순히 의원급 체크리스트를 제시한 연구가 아니다. 환자안전 정책의 패러다임을 '규제 중심'에서 '지원 중심', '병원 중심'에서 '의원 맞춤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정책적 제언이다.
영국과 미국, 호주, 일본의 공통점은 의료인을 처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환자안전의 파트너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도 의원급 의료기관을 환자안전 정책의 주변이 아닌 중심에 놓고, 현장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해야 할 때다. 그것이 환자와 의료진 모두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