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영 칼럼/한미약품이 다시 뛰고 있다. 실적만 놓고 보면 그렇다.
한미그룹은 7일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을 중심으로 구축한 전문경영인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면서 매 분기 최고 수준의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이는 어제 법원이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의 보유 주식에 대한 가압류 신청을 인용한데 따른 대응적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물론 숫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미사이언스는 지난해 매출 1조3500억원을 넘어섰고 올해 상반기에만 매출 7216억원, 영업이익 927억원을 기록했다. 핵심 사업회사인 한미약품도 지난해 매출 1조5475억원, 영업이익 2578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8년 연속 국내 원외처방 시장 선두를 지키고 있고, 혁신신약 연구개발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는 국산 GLP-1 계열 비만신약 출시를 예고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2조원대 규모의 글로벌 기술수출 성과까지 냈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한미가 강조하는 대로 전문경영인 체제 아래 사업 자체는 앞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이다.
문제는 회사의 실적과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 사이에 아직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미그룹은 “회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며 전문경영인 체제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관심은 여전히 오너 일가와 이른바 ‘4자 연합’을 둘러싼 지배구조 문제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법원이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의 보유 주식에 대한 가압류 신청을 인용하면서 이런 우려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신동국 회장이 제기한 100억원 규모 위약벌 채권 보전을 위한 가압류 신청과 관련해, 임 부회장이 신 회장·송영숙 회장·킬링턴 유한회사 등과 맺은 ‘4자 협약’의 의결권 공동행사 의무를 둘러싼 문제가 쟁점이 됐다.
특히 임 부회장 보유 지분 일부가 에쿼티퍼스트와의 환매조건부 거래를 거쳐 시장에 매각되면서 실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 규모와 우호지분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가압류는 본안 판결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지분율과 우호지분에 대한 시장의 여러 분석 역시 향후 계약관계와 주주 간 협력 구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어느 한쪽의 승패나 최종적인 경영권 향방을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 사안이 한미에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한미는 이제 스스로 물어야 한다.회사가 아무리 좋은 실적을 내더라도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된다면 시장은 과연 한미의 미래만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제약기업에서 신뢰는 다른 산업보다 훨씬 무겁다.
제약회사의 고객은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만이 아니다. 회사를 믿고 투자하는 주주가 있고, 의약품을 처방하는 의사가 있으며, 조제하고 복약지도를 하는 약사가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의약품에 맡기는 환자와 국민이 있다.
따라서 제약기업의 신뢰는 재무제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영의 투명성, 안정적인 지배구조, 준법경영, 연구개발의 지속성, 의약품 품질에 대한 책임, 주주와 시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미가 지금 가장 중요하게 관리해야 할 것은 어쩌면 매출이나 영업이익 이상의 **‘신뢰 자산’**인지 모른다.
한미약품은 한때 대한민국 제약산업의 자존심이자 K-제약바이오의 희망으로 불렸다.
복제약 판매에 머물던 국내 제약산업에서 과감하게 연구개발에 투자했고, 글로벌 신약 개발과 대규모 기술수출에 도전했다. 실패가 있어도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그 중심에는 고(故) 임성기 회장이 있었다.
임 회장이 평생 강조했던 것은 단순히 큰 제약회사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기술로 좋은 약을 만들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 대한민국이 ‘제약강국’으로 가야 한다는 꿈이었다.
지금 한미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오너 일가의 지분 몇 퍼센트가 어느 편에 서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약품이 앞으로 어떤 신약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놓느냐다. 누가 이사회에서 더 많은 표를 확보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실의 연구원이 마음 놓고 연구하고, 영업 현장의 직원이 자부심을 갖고 일하며, 글로벌 파트너가 한미를 믿고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경영권 갈등이 길어지면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회사다.
투자 결정이 흔들리고 우수 인재가 떠날 수 있다. 글로벌 파트너가 장기 계약을 주저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임직원들이 회사의 미래보다 경영권의 향방을 먼저 살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기업 경쟁력은 서서히 약해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한미에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의 전문경영인 체제가 성과를 내고 있고, 본업인 의약품 사업과 연구개발 역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오너와 주요 주주들이 해야 할 일도 명확하다.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경영하도록 하고, 이사회는 이를 투명하게 감독하며, 주요 주주는 회사의 장기적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구조가 아니라 회사가 이기는 지배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신동국 회장 역시 이번 사안이 4자 연합의 본질적인 균열을 의미하지 않는다면서 전문경영인 중심 체제 확립과 준법경영을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이제 그 원칙이 실제 경영현장에서 얼마나 일관되게 지켜지는지를 시장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미그룹도 내부 규정과 조직 운영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투명하게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그 약속은 말이 아니라 제도로 보여줘야 한다.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특수관계인 거래와 지분 변동을 둘러싼 시장의 의문에는 신속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주요 주주 간 계약과 지배구조 변화가 회사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시장이 예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미에 더 이상의 소모적인 갈등은 없어야 한다.
한미약품의 경쟁 상대는 한미사이언스의 어느 주주도, 창업주 가족의 어느 한쪽도 아니다. 진짜 경쟁 상대는 글로벌 시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신약을 내놓고 있는 세계의 제약바이오 기업들이다.
AI 신약개발, 비만·대사질환, 항암제, 희귀질환 등 글로벌 제약산업의 경쟁은 이미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한미가 내부 갈등에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세계 시장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좋은 실적은 기업을 성장시키지만 신뢰는 기업을 오래 살아남게 한다.
한미약품이 다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구개발 중심 제약기업으로 우뚝 서고 싶다면 이제 실적을 넘어 신뢰를 경영해야 한다.
주주가 믿고, 의사와 약사가 믿고, 환자와 국민이 믿으며, 글로벌 파트너가 장기간 함께할 수 있는 회사가 돼야 한다.
그것이 한미가 잃었던 명성을 완전히 되찾는 길이며, 고 임성기 회장이 평생 품었던 ‘제약강국 대한민국’의 꿈을 완성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한미의 시간과 에너지는 경영권이 아니라 신약으로, 갈등이 아니라 혁신으로 향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