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좋은 것이 하나 있다면 오래된 사람들과 오래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전 동아제약 황석현 전무를 비롯해 전 동성제약 나성열 이사, 전 조선무약 임백빈·지기호 이사, 이날 선약이 있어 참석하지 못한 김영주 국장, 그리고 불교사진가 장명확 씨 등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만난다. 제약업계에서 오랫동안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제약업계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요즘 회사들은 어떻다더라, 약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 같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화제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로 옮겨간다. 건강 이야기에서 자식 이야기로, 옛 직장 동료의 안부에서 어느덧 인생무상(人生無常)으로 흘러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이제는 성공과 실패를 따지기보다 “인생이 참 빠르다”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된다.
◇ “선배님, 내년도 달력 필요하지 않아요?”
어제 아침이었다. 모임 연락을 맡고 있는 장명확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님, 오늘 모임은 몇 시에 만나죠?”
오후 3시로 시간을 조정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장 작가가 불쑥 물었다.
“선배님, 혹시 내년도 달력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필요 없어”라고 짧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작가가 말을 이었다.
“선배, 사실은 내가 10년 전에 인도 순례 중 촬영한 불교성지 사진이 이번 조계사 달력 사진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그 사진 12점으로 내년도 달력이 제작됐는데, 며칠 전에 작가인 나한테 첫 달력이 왔어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사진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우리는 평소처럼 만났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평범한 정기모임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카메라를 들고 부처의 흔적을 찾아다녔던 한 사람이 큰 병마를 딛고 일어서 10년 전 자신이 찍었던 사진으로 새로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연 날이었다.
함께한 지인들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장명확 작가가 다시 건강하게 카메라를 들고 더 넓은 세상을 누비기를, 그의 사진 인생이 더욱 깊어지고 발전하기를 한마음으로 응원했다.
그 자리에서 2027년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불교성지를 찍은 사진으로 보였는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인생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 10년 전 찍은 사진이 다시 작가를 찾아오다
장명확 작가는 약 45년 동안 전국의 사찰과 불교 유적을 찾아다니며 카메라에 부처의 흔적과 수행자들의 신심을 담아왔다. 오래된 절집의 처마와 돌계단, 불탑과 불상, 새벽 산사의 안개와 빛까지 그의 앵글을 거쳤다. 개인전을 열 만큼 사진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그에게 사진은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어쩌면 또 하나의 수행이었을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을 얻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빛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계절을 기다린다. 때로는 하루 종일 기다리고도 원하는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 채 돌아와야 한다. 깨달음에 지름길이 없듯 좋은 사진에도 지름길은 없다.
그렇게 부처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장 작가는 10여 년 전 인도 불교성지 순례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불탑과 수행의 터, 붓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성지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이 10년 뒤 자신의 인생에서 이토록 특별한 의미로 돌아오게 될 줄은.
◇ 폐허가 아니라 시간을 찍다
사진 속 인도의 불교 유적은 화려하지 않다. 세월에 닳은 붉은 벽돌과 흙, 오래된 탑, 나무와 들판,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르거나 저무는 태양이 있다. 어떤 곳은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물어져 있다. 그러나 그 적막함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붓다는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길 위의 수행자가 됐다. 인간은 왜 늙고 병들며 죽어야 하는가.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그 질문을 안고 길을 떠났고 고행을 거쳐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장 작가가 찍은 사진 12점은 1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면서 마치 붓다의 탄생과 출가, 수행과 고행, 깨달음과 설법,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긴 여정을 따라가는 듯하다.
그래서 이 달력은 단순히 날짜를 확인하는 달력이 아니다. 열두 장의 사진으로 읽는 ‘붓다의 길’이자 한 편의 서사시다. 불자가 아닌 사람이 보더라도 그 안에는 누구나 자신의 삶과 겹쳐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태어나고, 꿈꾸고, 좌절하고, 아파하고, 다시 일어서며 마침내 무엇인가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 사진만 좇던 사람에게 찾아온 시련
평생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누비던 장 작가에게도 어느 날 시련이 찾아왔다. 작품세계에 몰두하면서 정작 자신의 건강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탓일까. 몇 년 전 그는 큰 아픔을 겪었다.
전국의 산사를 찾아다니고 먼 인도까지 순례했던 사람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사진가에게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진은 기다리는 예술이기도 하지만 결국 찾아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불편만을 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수행자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원력을 믿으며 꾸준히 재활에 나섰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움직임이 그에게는 하루의 목표였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 꼭 깊은 산중에서 좌선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움직이고 내일 또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 역시 인간이 할 수 있는 치열한 수행이 아닐까.
그렇게 장 작가는 자신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 107명 가운데 ‘대상’
지난 4월 조계사 측은 2027년 달력 제작을 위한 사진 공모에 나섰다. 응모자는 무려 107명이었다.
장 작가도 아픈 몸을 이끌고 오래된 사진 자료를 다시 꺼냈다. 10년 전 인도 순례길에서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겠다는 거창한 욕심도 없었다고 한다. 사진을 골라 “그냥 한번 내봤다”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대상.
107명의 응모자 가운데 그의 작품이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됐다. 10년 전 인도에서 눌렀던 셔터가 병마와 재활의 시간을 건너 대상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장 작가에게 정작 중요했던 것은 대상이라는 명예도, 상금도 아니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따로 있었다.
“부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는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혼자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그 눈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 있었을까. 몸이 아파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날들, 다시 걸어보려고 애쓰던 시간, 카메라를 다시 제대로 들 수 있을지 스스로 물었던 순간,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절망과 외로움.
그 모든 것이 ‘대상’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 세월에 상처 입어도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한다. 무상(無常)이다. 젊음도 영원하지 않고 건강도 영원하지 않으며 성공과 명예 또한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나 무상은 반드시 허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지금의 고통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진 속 저녁 해는 지지만 다음 날 다시 떠오른다. 수천 년 된 불탑의 벽돌은 부서지고 닳았어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처가 있다고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무너진 흔적이 있다고 아름다움까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명확 작가의 삶과 그의 사진이 절묘하게 겹쳐진다.
그가 10년 전 인도에서 촬영한 것은 어쩌면 불탑과 성지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훗날의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와 희망을 카메라에 담았던 것은 아닐까.
사진은 사람이 찍는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때로는 사진이 사람에게 말을 건다. 10년 전 장 작가가 찍었던 인도의 불탑과 수행지는 병마를 겪고 일어선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괜찮다. 아직 길은 남아 있다.
그것은 불교 신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멈춰 선다. 질병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왜 하필 나인가.’
그러나 붓다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넘어설 길을 찾았듯 어느 순간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어떻게 다시 걸어갈 것인가.’
장 작가는 그 답을 말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며 견뎌낸 재활의 시간이었다.
◇ 열두 장의 사진, 열두 번의 새로운 시작
2027년 달력에는 장명확 작가의 사진 12점이 1월부터 12월까지 실렸다. 한 해 동안 우리는 달력을 열두 번 넘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봄이 지나 여름이 온다. 다시 가을을 거쳐 겨울을 맞는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다. 좋은 날만 계속되지 않지만 힘든 날 또한 영원하지 않다.
그렇기에 달력 속 열두 장의 사진은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하는 열두 개의 거울인지도 모른다. 태어나 길을 찾고, 고통을 만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마침내 놓아야 할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다. 종교가 달라도 인간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달력은 불교 달력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 걸어가는 길에 관한 달력이다.
완성된 첫 시제품은 작가에게 가장 먼저 전달됐다. 먼 인도 땅에서 바라보았던 풍경들이 열두 달의 시간이 되어 그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달력을 받아든 순간 장 작가에게 그것은 단순한 작품집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45년 동안 자신이 부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힘겨운 순간에는 그 길이 오히려 자신을 찾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길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 모임을 마치며 다시 장 작가를 바라봤다. 아직 그의 몸에는 지난 시련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걷고 있고, 다시 사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다시 자신의 길 위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명확 작가의 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우리 모두 그의 앞날을 응원했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의 기쁜 일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다는 것. 그것 또한 나이 들어 얻는 큰 복인지 모르겠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자 아침에 걸려왔던 장 작가의 전화가 자꾸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달력 한 권을 건네겠다는 평범한 전화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니 그가 내게 건넨 것은 달력 한 권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아픔을 견디며 다시 일어선 한 사람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오래전 맺은 작은 인연이 가장 힘겨운 세월을 건너 어느 날 꽃이 되어 돌아온 삶의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장 작가가 대상 소식을 듣고 흘린 눈물 속의 한마디가 그래서 더욱 깊이 다가온다.
“부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어쩌면 그것이 이 달력이 그에게 건넨 가장 큰 상이 아니었을까.
◇ 새벽, 마지막 문장을 찍으며
이 만필을 쓰는 새벽 내내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아픔과 재기, 그리고 오랜 세월을 돌아온 사진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탓인지 몇 번이나 글을 멈춰야 했다.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렸다.
기자로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수많은 사연을 기사로 옮겼지만, 오늘 새벽만큼은 글을 쓰는 기자가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한 사람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는 친구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새벽이 깊어간다. 나는 이제야 힘겹게 마지막 문장을 찍는다.
10년 전 그가 부처의 길을 찾아 인도로 떠났다면, 10년이 지난 오늘에는 그 길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