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처서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의 여름은 좀처럼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늘 평소 친하게 지내는 홍보대행사 토스트앤컴퍼니 박용만 사장과 점심을 했다. 가끔 오찬을 함께하는 사이지만 이날은 김용발 회장이 충무로 솔라고호텔 뷔페가 맛있다고 추천해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했다. 원래 송파구청장을 역임한 이유택 전 청장도 동석하기로 했으나 급한 개인 용무가 생겨 아쉽게 함께하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이 있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있으니 점심 한 끼가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란 늘 그렇다. 밥을 먹으러 갔다가 사람의 마음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노 대표, 칼럼을 너무 맛깔나게 잘 써”
얼마 전 박용만 사장이 SNS로 안부를 물어왔다.
“휴가는 다녀오셨어요?”
그때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게 휴가야.”
생각해보면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시간이 나면 책을 산다. 신간이 나오면 눈길이 가는 책부터 찾아 읽는다.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AI 공부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쏟고 있다.
신문을 만드는 일도 예전과 달라졌다. 기사를 받아 정리하고 내보내는 것만으로 독자를 붙잡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칼럼과 만필을 쓰고, 메디팜헬스뉴스의 제약·바이오 공시를 분석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밤낮이 따로 없다. 하나라도 더 읽고, 한 줄이라도 더 생각하고, 어제보다 조금 나은 신문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박 사장이 대뜸 말했다.
“노 대표, 요즘 칼럼을 너무 맛깔나게 잘 써.”
뜻밖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글이 좋다는 말보다 기분 좋은 칭찬이 또 있을까.
쑥스러워 웃어넘겼지만 마음 한편은 따뜻해졌다.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들,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고 씨름했던 시간들이 누군가에게 조금씩 보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도 칭찬은 좋은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새벽 7시, 여전히 회사로 향하는 사람
박용만 사장은 홍보와 마케팅 분야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마케팅과 홍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한국도자기에서 홍보책임자로 일했고, 락토메이슨에서는 영업·마케팅 총괄 부사장을 역임했다.
은퇴할 나이가 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홍보대행사 토스앤컴퍼니를 창업했다. 특히 스타트업 홍보 분야를 개척하면서 업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스타트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토스앤컴퍼니와 박용만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 그에게 오늘 근황을 물었다.
그런데 예전과 달랐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목소리에도 힘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얼굴 어딘가에 그늘이 있었다.
“요즘 어때?”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어렵지.”
그리고 홍보를 맡길 회사가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말 뒤에 긴 한숨이 따라왔다.
요즘 스타트업 업계에도 찬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새로운 기업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가 하면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곳도 적지 않다고 한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홍보와 마케팅 비용부터 줄이려는 경우가 많다.
스타트업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그의 회사까지 밀려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박 사장의 하루는 누구보다 일찍 시작된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구운 고구마 하나를 챙겨 집을 나선다고 했다. 삼성동 사무실에 도착하는 시간이 대략 오전 7시.
그때부터 일을 시작한다.
일흔을 막 채운 사람이 아침 7시에 사무실 책상 앞에 앉는다.
그 말을 듣는데 마음 한쪽이 묘했다.
◇웃고 있는데 왜 쓸쓸해 보였을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조금 편안해질 줄 알았다.
젊을 때 열심히 살았으니 일흔을 막 넘기면 세상 걱정에서 조금은 비켜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누군가는 새벽에 고구마 하나를 싸 들고 회사로 향하고, 누군가는 밤늦도록 기사를 고치고 칼럼을 쓴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뛰느라 힘들었고, 이제는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 뒤처지지 않으려고 다시 뛴다.
박 사장이 요즘은 예전처럼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며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웃고 있는데 그 옆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 표정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아마 그의 모습에서 나를 조금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흔의 넋두리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 이야기, 사람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젊었을 때 같았으면 “조금만 더 힘내면 된다”고 쉽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살아보니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거창한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저 듣고, 웃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일흔을 막 채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헤어질 시간이 됐다.
악수를 했다.
“잘해 봅시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발걸음에는 뭔가 5%쯤 부족한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줄 걸 그랬나.
내 이야기는 조금 덜 하고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물어볼 걸 그랬나.
친한 사람과 헤어진 뒤에는 언제나 하지 못한 말들이 생각난다.
◇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더웠다.
처서가 지났지만 한낮의 여름은 완강했다.
문득 박용만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벽 6시에 일어나 고구마 하나를 챙겨 들고 오전 7시면 삼성동 사무실에 도착하는 사람.
사업이 어렵다면서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출근할 사람.
그리고 자신의 어려움보다 먼저 “노 대표, 칼럼 맛깔나게 잘 써”라며 친구의 글을 칭찬해주던 사람.
언제쯤 그의 얼굴에 다시 환한 웃음꽃이 필까.
나는 그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살다 보면 계절은 반드시 바뀐다.
아무리 긴 여름도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어보면 서늘한 바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사람 사는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 힘든 사람이 내일은 조금 덜 힘들고, 오늘 한숨을 쉬었던 사람이 내일은 웃을 일이 하나쯤 생기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 역시 내일이면 다시 책을 펼치고 컴퓨터 앞에 앉을 것이다.
그도 다시 고구마 하나를 챙겨 삼성동으로 향할 것이다.
일흔을 막 채운 우리는 아직 일을 하고 있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오늘 서울은 여전히 덥다.
하지만 가을은 분명 오고 있다.박용만 사장의 얼굴에도, 우리 모두의 삶에도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선선한 바람과 함께 환한 웃음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