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9월 21일은 ‘치매 극복의 날’이다. 올해 이날을 맞는 마음은 예년과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이제 ‘치매환자 100만명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100만명. 단순한 환자 통계로만 볼 숫자가 아니다. 치매환자 한 사람 뒤에는 그 사람의 기억을 대신해주고 약을 챙기며 식사를 돌보고, 혹시 집을 나가 길을 잃지는 않을까 밤잠을 설치는 가족이 있다. 환자가 100만명이라면 치매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까지 포함한 사회적 영향은 그 몇 배에 이를 것이다.
더욱이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높은 경도인지장애 인구는 이미 수백만명에 이른다. 이제 치매를 나이가 들면서 일부 사람에게 찾아오는 개인의 불행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예방과 조기진단에서 치료, 돌봄, 가족지원, 나아가 재산과 자기결정권 보호까지 국가와 사회가 함께 관리해야 할 대표적인 고령사회 질환이 됐다.
그렇다면 치매 100만명 시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100만명보다 먼저 봐야 할 경도인지장애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의 치매역학조사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치매환자는 100만명 시대 진입을 앞두고 있다. 치매 예방이라는 관점에서는 이미 수백만명에 이르는 경도인지장애 인구도 주목해야 한다.
경도인지장애는 정상적인 노화와 치매 사이에 놓여 있는 단계다. 기억력과 언어능력, 판단력 등 인지기능은 떨어졌지만 독립적인 일상생활 능력은 상당 부분 유지돼 아직 치매로 진단되지는 않는 상태다.
모든 경도인지장애 환자가 치매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인지기능을 가진 사람보다 치매로 진행할 위험이 높기 때문에 이 시기는 치매관리의 중요한 ‘골든타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베타 아밀로이드를 표적으로 해 질환 진행을 늦추는 치료제도 국내에 도입됐다. 이러한 치료가 경도인지장애나 초기 알츠하이머병 단계에서 적용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일찍 위험군을 발견하고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로 연결하느냐가 더욱 중요해졌다.
치매 국가관리의 출발점을 ‘치매에 걸린 뒤’에만 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예방도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운동을 하고 담배를 끊고 혈압과 당뇨를 관리하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꾸준히 머리를 쓰는 것은 치매 예방을 위해 중요하다. 난청과 시력 저하, 우울, 비만, 사회적 고립 등 관리할 수 있는 위험요인을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건강관리를 잘하면 된다”는 말만으로 국가의 역할이 끝나서는 안 된다.
난청이 있는 노인이 적절한 청력관리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고혈압과 당뇨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사는 노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지역사회가 연결해야 하며 인지기능 저하가 의심되면 치매안심센터와 의료기관에서 조기에 검사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예방과 조기발견 역시 국가 치매정책의 한 축이어야 한다.
정부도 제5차 치매관리종합계획을 통해 치매관리주치의와 경도인지장애 관리, 가족지원, 치매친화적 지역사회 조성 등을 확대하고 있다. 정책 방향은 옳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런 제도가 국민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고 실제 필요한 순간에 이용할 수 있느냐다.
◇환자 한 명 뒤에는 지쳐가는 가족이 있다
치매정책을 이야기하면서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이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일에는 퇴근시간이 없다. 식사와 투약, 위생관리는 기본이고 반복되는 질문과 행동, 배회와 수면장애 등에 대처해야 한다. 중증으로 진행되면 보호자가 사실상 24시간 환자 곁을 지켜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누군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누군가는 근무시간을 줄인다. 소득은 줄어드는데 의료비와 요양·간병 부담은 커진다. 오랜 돌봄으로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이고 보호자 자신의 건강이 무너지거나 가족관계가 흔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부모를 돌보는 것을 가족의 도리와 책임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치매환자가 100만명에 이르는 초고령사회에서도 가족의 사랑과 희생만으로 이 문제를 감당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어렵다.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의 지원이 아니다. 국가와 지역사회가 일정 기간 가족을 대신해 환자를 안전하게 돌보고 보호자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실질적인 휴식돌봄이 필요하다. 야간과 응급상황에 대응할 서비스, 치매 행동심리증상에 대응할 전문인력, 가족에 대한 경제적·정서적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
치매가족에게 휴식은 사치가 아니다. 가족이 무너지지 않고 돌봄을 이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치매정책이다.
◇미국은 환자와 가족을 하나의 ‘돌봄 단위’로 본다
외국의 치매정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가족을 단순히 ‘환자를 돌봐야 할 사람’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메디케어·메디케이드서비스센터(CMS)의 GUIDE(Guiding an Improved Dementia Experience) 모델은 치매환자에게 통합적인 치료와 돌봄을 제공하면서 가족돌봄자도 공식적인 지원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환자와 가족에게 돌봄 조정과 상담을 제공하고 가족돌봄자를 위한 교육과 지역사회 서비스 연결, 24시간 지원체계를 운영한다.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는 가족이 잠시 돌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휴식돌봄도 지원한다.
정책목표는 분명하다. 치매환자가 가능한 한 자신이 살던 집과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도록 지원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가족까지 함께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치매환자와 가족을 별개의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돌봄 단위’로 바라보는 접근이다. 우리도 치매가족 지원정책을 이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치매환자의 ‘돈’은 누가 지킬 것인가
치매가 진행되면서 가족이 맞닥뜨리는 또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재산이다.
인지기능과 판단능력이 떨어지면 평생 모은 재산을 스스로 관리하기 어려워진다. 금융사기나 보이스피싱, 갈취와 경제적 학대 등에 노출될 위험도 커진다. 의료비와 요양비, 생활비를 누가 어떤 원칙으로 관리하고 지급할 것인지도 가족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이런 점에서 국민연금공단이 올해 시범사업을 시작한 ‘치매안심 재산관리서비스’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치매나 경도인지장애 등으로 재산관리에 어려움이 있거나 앞으로 어려움이 예상되는 사람이 본인 또는 후견인의 의사에 따라 신탁계약을 체결하면 공공기관인 국민연금공단이 재산을 관리하면서 의료비와 요양비, 생활비 등 본인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아직 시범사업 단계이고 이용대상과 관리할 수 있는 재산의 범위 등에 제한이 있지만 의미는 작지 않다. 국가 치매정책의 영역이 치료와 요양에서 한발 더 나아가 환자의 재산과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는 영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매환자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통장의 돈을 지켜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생 일해 모은 재산이 자신이 원하는 치료와 돌봄, 주거와 생활을 위해 사용되도록 보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도 연결된 문제다.
◇일본은 치매 전부터 재산과 미래를 준비한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경험한 일본의 치매정책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치매 등으로 판단능력이 떨어진 사람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성년후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예금이나 부동산 관리뿐 아니라 의료·요양·복지서비스 계약 등을 혼자 처리하기 어려울 때 후견인이 이를 지원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임의후견제도다. 아직 판단능력이 충분할 때 앞으로 자신을 도울 사람과 맡길 일을 미리 정해 계약해 놓고, 이후 판단능력이 저하되면 후견이 작동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치매에 걸린 뒤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내가 판단하기 어려워지면 누가 내 삶과 재산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본인이 건강할 때 결정해두는 것이다.
일본은 이와 함께 판단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고령자 등이 지역사회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도록 복지서비스 이용과 예금 입출금, 생활비 관리 등을 돕는 일상생활자립지원사업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치매안심 재산관리서비스와 일본의 후견·금전관리제도는 운영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공통점이 있다.
치매환자의 재산 문제를 가족에게만 맡기지 않고 공적인 시스템 안에서 보호하면서 가능한 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우리도 한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치매에 걸린 다음의 재산관리뿐 아니라 판단능력이 충분할 때 자신의 미래 돌봄과 재산관리에 관한 의사를 미리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제도와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야 한다.
◇흩어진 제도를 ‘한 사람’ 중심으로 연결해야
우리나라에는 이미 치매안심센터, 치매관리주치의, 장기요양보험, 치매안심병원, 공공후견, 가족지원과 재산관리 등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 있거나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제도의 숫자가 아니다.
치매환자와 가족의 입장에서 이 제도들이 하나로 연결돼 있느냐가 중요하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인지기능 저하가 발견되면 의료기관의 진단과 치료로 연결되고 돌봄이 필요해지면 장기요양서비스가 따라붙어야 한다. 가족이 지치면 휴식돌봄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판단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공공후견이나 재산관리서비스가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한다.
환자와 가족이 어떤 제도가 있는지 몰라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한 사람의 상태와 필요를 파악해 의료·요양·복지·가족지원·재산관리 서비스를 연결해주는 체계로 발전해야 한다.
새로운 제도를 계속 만드는 것 못지않게 이미 있는 제도를 ‘한 사람 중심’으로 연결하는 일이 중요하다.
◇치매가 앗아가서는 안 되는 마지막 것, 존엄
치매환자가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살 것인지, 어떤 치료와 돌봄을 받을 것인지, 누구와 함께 지낼 것인지, 평생 모은 재산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본인의 뜻은 가능한 한 오래 존중돼야 한다.
그래서 치매정책은 단순히 환자의 기억과 행동을 관리하는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의 남은 삶을 지켜주는 정책이어야 한다.
치매 100만명 시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답은 이제 분명해지고 있다.
치매에 걸린 뒤 병원과 요양시설에서 환자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년부터 치매 위험요인을 줄이고 경도인지장애를 조기에 찾아내 치료와 관리로 연결해야 한다. 치매가 발생하면 의료와 요양, 복지가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하고 가족에게는 실질적인 휴식과 경제적·정서적 지원이 제공돼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치매로 판단능력이 떨어지더라도 평생 이뤄온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족의 사랑이 깊다고 해서 국가가 져야 할 책임까지 가족에게 넘길 수는 없다.
치매 100만명 시대는 환자 100만명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만을 묻는 시대가 아니다. 그 환자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아직 치매에 걸리지 않은 국민의 위험을 어떻게 낮출 것인지, 그리고 치매환자의 재산과 자기결정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마지막까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치매를 한 가정이 감당해야 할 병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예방에서 조기진단과 치료, 돌봄과 가족의 휴식, 재산과 존엄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질 것인가.
치매 100만명 시대,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사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