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의약품규제기관국제연합(ICMRA) 집행위원회에 처음 진출했다. 단순히 국제회의에 참석할 자리를 하나 더 얻은 것이 아니다. 세계 주요 의약품 규제기관들이 앞으로 어떤 문제를 공동으로 다루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 한국이 직접 참여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
오는 11월에는 서울에서 ICMRA 정상회의 및 총회도 처음 열린다. 세계 주요 의약품 규제기관장들이 서울에 모여 인공지능(AI), 첨단바이오, 국가 간 공동심사, 혁신신약의 신속한 도입 등 미래 규제 현안을 논의한다. 한국 식약처가 글로벌 규제의 변방에서 선진 규제를 받아들이던 기관에서 국제 규제질서 형성에 목소리를 내는 기관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는 기회다.
나는 이번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축하만 하고 끝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집행위원회에 들어가는 것과 그 안에서 의제를 만들고 다른 국가를 설득하며 국제 규제기준을 주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 의약품 규제의 ‘룰’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의약품은 한 나라의 규제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신약 하나가 개발돼 세계시장에 나오기까지 임상시험, 허가심사, 제조·품질관리(GMP), 안전성 감시, 위해성 관리 등 거의 모든 과정이 국제 규제기준과 연결돼 있다.
그 중심에는 몇 개의 주요 국제 협의체가 있다.
먼저 ICMRA는 세계 주요 의약품 규제기관의 기관장급 협의체다. 글로벌 보건위기와 새로운 규제 문제에 공동 대응하고 규제기관 간 전략적 협력 방향을 결정한다. 이번에 식약처가 처음 진출한 집행위원회는 그 방향과 우선과제를 결정하는 핵심 기구다.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다. 신약의 품질(Quality), 안전성(Safety), 유효성(Efficacy)과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국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곳이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기준은 각국 의약품 허가와 개발의 사실상 국제표준으로 작동한다.
ICH의 역사와 지배구조를 들여다보면 세계 의약품 규제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현재 ICH의 창립 규제회원은 미국 FDA, 유럽 EC, 일본 후생노동성(MHLW)·의약품의료기기종합기구(PMDA)다. 이들은 ICH 관리위원회에 상임 대표를 두는 구조적 지위를 갖고 있다. 한국 식약처도 ICH 규제회원이며 관리위원회 선출 대표로 활동하고 있지만, 미국·유럽·일본이 국제 의약품 규제조화의 초기 질서를 만들고 오랫동안 중심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의약품 제조·품질관리 분야에서는 의약품실사상호협력기구(PIC/S)가 중요하다. 세계 규제기관들이 GMP 실사기준과 품질관리 수준을 조화시키는 국제 협력체다. 한국 식약처도 2014년 가입했다. 현재 57개 규제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2026~2027년 PIC/S 의장은 미국 FDA가 맡고 있다. 집행부에도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브라질, 캐나다, 이탈리아, 대만 등의 규제기관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의약품규제프로그램(IPRP)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IPRP는 각국 규제기관이 제네릭, 바이오시밀러, 세포·유전자치료제, 나노의약품, 품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규제 접근의 수렴을 추진하는 협력체다. 미국 FDA, 유럽, 일본 PMDA뿐 아니라 한국 식약처, 중국 NMPA, 브라질 ANVISA, 싱가포르 HSA 등 다양한 규제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 의약품 규제는 하나의 기구가 독점하는 구조가 아니다. ICMRA, ICH, PIC/S, IPRP와 WHO 규제체계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연결되면서 글로벌 규제질서를 형성한다.
◇한국은 이미 ‘따라가는 규제기관’ 수준을 넘어섰다
식약처의 국제적 위상이 과거와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한국은 WHO의 의약품 규제시스템 평가에서 최고 수준인 성숙도 4단계(ML4)를 달성했다. WHO는 2022년 한국이 의약품과 백신 규제에서 ML4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식약처는 WHO 우수규제기관(WLA)에 이름을 올렸고 2025년에는 의약품 분야에서도 모든 규제기능으로 인정 범위가 확대됐다.
ICH 규제회원이자 관리위원회 선출 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PIC/S와 IPRP에도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이번 ICMRA 집행위원회 진출까지 더해졌다.
이 정도면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단순히 선진국 규제를 배우고 도입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제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그것은 ‘규제 수용국’에서 ‘규제 제안국’으로, 다시 말해 국제 규칙을 받아들이는 나라에서 국제 규칙을 만드는 나라로의 전환이다.
◇FDA·유럽·일본과 경쟁하려면 ‘간판’보다 시스템이 중요하다
국제회의의 자리는 외교로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규제 리더십은 실력 없이 유지되지 않는다.
세계가 미국 FDA를 주목하는 이유는 미국이 큰 시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기간 축적한 심사 전문성과 과학적 규제 역량, 방대한 데이터, 전문인력, 연구기반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역시 유럽의약품청(EMA)을 중심으로 회원국 규제기관이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의약품을 평가한다. 일본도 후생노동성과 PMDA를 중심으로 심사·안전관리·국제조화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왔다.
한국이 이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을 넘어 논의를 주도하려면 식약처 내부 시스템도 이에 걸맞게 계속 바뀌어야 한다.
첫째는 전문인력이다. AI 신약, 세포·유전자치료제, ADC, mRNA, 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의약품 등 새로운 치료기술은 기존의 심사방식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산업보다 규제기관의 전문성이 뒤처지는 순간 규제 주도권도 잃게 된다.
따라서 심사인력의 숫자뿐 아니라 전문성과 경력의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우수한 과학자와 임상·통계·제조 전문가들이 식약처에서 장기간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도록 인사·보수·경력체계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심사의 속도와 예측 가능성이다. 신속심사가 단순히 심사기간을 줄이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개발 초기부터 규제기관과 기업이 과학적 근거를 놓고 논의하고, 필요한 자료와 기준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데이터와 규제과학이다. 앞으로의 규제 경쟁력은 서류를 얼마나 빨리 처리하느냐보다 실제임상자료(RWD), 실제임상근거(RWE), AI, 바이오마커와 첨단 분석기술을 얼마나 능숙하게 규제 판단에 활용하느냐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넷째는 국제공동심사와 규제신뢰(reliance) 체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 한국에서 인정받은 심사결과가 다른 나라에서 신뢰받고, 반대로 신뢰할 수 있는 해외 규제기관의 평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업의 해외 진출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식약처의 한정된 심사자원을 혁신제품과 고위험 분야에 집중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국제협의체 ‘회원국’보다 ‘의제를 만드는 국가’가 돼야
앞으로 식약처의 국제활동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몇 개 국제기구에 가입했는가, 국제회의에 몇 차례 참석했는가만으로는 부족하다. 국제 협의체에서 어떤 의제를 제안했고, 어떤 가이드라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한국이 제안한 규제방식이 몇 개 국가의 제도로 확산됐는지를 봐야 한다.
ICH에서도 한국 전문가가 더 많은 가이드라인의 작성과 개정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PIC/S에서도 GMP의 미래 기준을 만드는 핵심 자리에 더 적극적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 IPRP의 바이오시밀러, 세포·유전자치료제, 품질 분야에서도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과 규제 경험을 국제기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ICMRA 집행위원회 진출을 계기로 AI와 첨단바이오 분야만큼은 한국이 국제 규제의 ‘패스트 팔로어’가 아니라 선도국이 되겠다는 목표도 세워볼 만하다.
세계 의약품 산업은 이미 규제 경쟁의 시대에 들어섰다. 좋은 신약을 개발하는 기업만큼 그 신약을 제대로 평가하고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규제기관의 경쟁력이 중요해졌다.
◇11월 서울회의를 ‘행사’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11월 서울에서 처음 열리는 ICMRA 정상회의와 총회는 중요하다.
40개국 규제기관장이 서울에 모인다는 사실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회의가 끝난 뒤 무엇이 남느냐다.
한국이 제안한 규제 의제가 국제 공동과제로 채택되고, 한국 전문가가 실무그룹을 이끌고, 한국의 심사·허가 경험이 다른 나라가 참고하는 모델이 돼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규제외교의 성과다.
식약처가 이번 ICMRA 집행위원회 진출을 하나의 ‘국제적 성과’로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식약처 자체를 미국 FDA, 유럽 규제시스템, 일본 PMDA와 실질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조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조직과 인력을 확충하고 심사 전문성을 높이며 규제과학과 데이터 기반을 강화하는 일에는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 정부도 식약처에 세계 수준의 규제기관이 되라고 주문하면서 그에 필요한 전문인력과 투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제약바이오기업은 이제 세계시장에서 신약과 바이오의약품으로 경쟁하고 있다. 규제기관 역시 세계 수준이어야 한다.
ICMRA 집행위원회 진출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더 반가운 소식은 몇 년 뒤 한국 식약처가 ICMRA뿐 아니라 ICH, PIC/S, IPRP 등 주요 국제 규제협의체에서 의제를 제안하고 회의를 이끌며 국제기준을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한국이 만든 의약품이 세계로 가는 시대를 넘어, 한국이 만든 규제기준을 세계가 참고하는 시대. 식약처가 이제 그 길을 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