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귀 유전자 뇌전증 환자가 병원에서 진료받는 순간뿐 아니라 일상에서 겪는 경련과 수면, 행동 변화, 활동량과 삶의 질까지 장기간 추적해 질환의 자연 경과를 규명하는 국내 첫 연구가 시작된다. 축적된 데이터는 향후 신약 임상시험과 진료지침, 규제기관의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실사용 근거로 활용될 전망이다.
서울대병원 소아신경과 김우중 교수팀은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의 지원을 받아 ‘희귀 유전자 변이에 의한 발달 및 뇌전증성 뇌병증’ 환자를 대상으로 라이프로그 기반 자연사 연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발달 및 뇌전증성 뇌병증은 경련 발작과 함께 발달 지연이 동반되는 중증 뇌전증이다. 최근 유전자 검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소아 뇌전증 가운데 상당수가 특정 유전자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문제는 진단 이후다. 원인을 찾아내는 진단율은 높아졌지만 사용할 수 있는 치료 수단은 여전히 부족하고, 환자가 극히 적은 희귀 유전자 질환일수록 연구와 치료제 개발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국내에는 이들 뇌전증성 뇌병증 환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증상과 기능 변화를 겪는지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자연사 데이터가 아직 구축돼 있지 않다.
치료제 없는 희귀질환…‘질병 자체의 경과’가 신약개발 중요 근거
자연사 연구는 치료 개입 없이 질환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표준화된 항목으로 장기간 관찰하는 방식이다. 충분한 환자 수를 확보하기 어려운 희귀질환에서는 이렇게 축적된 질병의 자연 경과가 새로운 치료제의 효과를 평가하기 위한 외부 대조군 역할을 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척수성 근위축증(SMA) 치료제 개발 과정에서 자연사 연구가 신약개발의 근거로 활용된 사례가 있으며, 뇌전증성 뇌병증을 대표하는 드라베 증후군과 SYNGAP1 관련 질환에서도 각각 ENVISION과 ProMMis 자연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국내 희귀 유전자 뇌전증 자연사 연구의 기반을 만들고, 향후 축적된 데이터를 임상시험에 준하는 실사용 근거로 활용함으로써 환자들의 새로운 치료제 접근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연구는 서울대병원이 주관기관을, 분당서울대병원이 세부기관을 맡는다. 인하대병원·고려대 안산병원·조선대병원·충북대병원·보라매병원·중앙대 광명병원·경북대병원 등 전국 8개 이상의 협력병원이 참여하는 다기관 네트워크로 진행된다.
경련 동영상부터 수면·심박까지…병원 밖 환자 일상 데이터 수집
이번 연구의 특징은 환자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라이프로그’ 형태로 직접 축적한다는 점이다.
환자와 보호자는 라이프엑스와 공동 개발 중인 모바일 앱을 이용해 경련과 이상운동, 수면, 행동, 삶의 질 등을 전자일지와 동영상으로 기록한다.
연구팀은 상명대 윤희남 교수팀과 진행하는 웨어러블 연구를 통해 활동량과 수면 패턴, 심박변이도 등 객관적인 생체 데이터도 수집한다. 이를 토대로 경련 및 증상 악화가 수면·활동·자율신경계 변화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 분석하고, 질환의 중증도와 예후를 반영할 수 있는 ‘디지털 바이오마커’ 후보를 발굴할 계획이다.
여기에 발달, 행동·정서, 일상 운동능력, 의사소통, 일상생활 의존도, 수면 및 삶의 질을 포괄하는 표준화된 평가체계를 전국 거점병원에 동일하게 적용해 다기관 데이터를 축적한다.
환자와 보호자도 연구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연구팀은 워크숍과 심포지엄을 통해 환자와 가족이 실제 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치료 목표와 어려움을 연구 설계에 반영할 방침이다.
그 일환으로 지난 7월 25일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는 ‘희귀 유전자 뇌전증 심포지엄’이 열렸다. 환자 부모와 연구자, 임상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면과 행동, 유전자 진단 및 정밀치료부터 제도적 지원까지 환자와 가족의 일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논의했다.
희귀 뇌전증 넘어 다른 희귀질환으로 플랫폼 확대
연구팀은 이번 다기관 연구를 통해 구축되는 표준 플랫폼을 향후 다른 희귀질환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자연사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면 새로운 치료제 개발뿐 아니라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규제기관의 의사결정과 임상 진료지침을 마련하는 근거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장 채종희 교수는 “희귀 유전자 뇌전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진단만큼이나 치료 및 일상에서의 돌봄과 관련된 정보가 절실하다”며 “새로운 치료 및 관리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우중 서울대병원 소아신경과 교수는 “희귀 유전자 뇌전증은 진단을 받아도 정작 임상 현장에서 근거 있는 치료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며 “환자와 가족의 일상 속 삶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모아 향후 치료제 개발과 실질적인 진료 개선으로 이어지는 근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