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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ㆍ약사

노재영 만필/ ‘우리 원료로 해보자’…이니스트 김국현회장이 다시 거는 제약 승부

해남에서 목포 거쳐 서울로…약업계에서 잔뼈 굵히고 창업의 풍랑 견딘 제약인
원료의약품 넘어 항암제·CDMO·ADC까지 새로운 승부…“건강하게 오래 봅시다”

오랜만에 제약업계 원로들과 서초동 낙천정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한두 해 약업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성장과 부침을 현장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이어서인지 식탁에 오른 이야기도 묵직했다. 이른바 약가인하 문제부터 혁신형 제약기업 선정, GMP와 제조 현장의 어려움,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원료의약품 공급망까지 대화는 쉼 없이 이어졌다.

제약업계가 지금 안고 있는 고민이 저녁 식탁 하나에 거의 다 올라온 셈이다. 약가는 기업의 수익성과 연구개발 여력에 직결되고, 혁신형 제약기업 선정은 정부가 어떤 기업과 혁신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것인가의 문제다. GMP는 국내 공장 관리의 차원을 넘어 세계시장에 나가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됐고, 중국과 인도 등에 대한 원료의약품 의존 문제는 이제 가격을 넘어 공급망과 보건안보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유독 자주 등장하는 회사가 하나 있었다.

이니스트에스티.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이 말을 보탰다. 요즘 이 회사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 증권시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형 제약·바이오기업도 아닌데 오랫동안 제약산업을 지켜본 원로들의 관심이 한곳으로 모인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 중심에 김국현 회장이 있다.

김 회장의 삶을 돌아보면 기업 연혁보다 한 사람의 긴 여정이 먼저 보인다. 전남 해남에서 출발해 목포를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K-바이오니 글로벌 신약이니 하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다. 동화약품을 비롯한 약업계 현장에서 일하며 약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시장에서 어떻게 팔리며 기업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몸으로 배웠다.

말 그대로 약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러나 남의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다고 자기 기업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창업 이후에는 더 거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금과 사람, 공장과 기술, 허가와 영업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특히 원료의약품은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해외 업체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분야다. 기술이 있어도 가격에서 밀리면 시장을 잃고, 가격을 좇으면 수익성이 흔들린다.

김국현은 그 시간을 버텼다. 잘될 때보다 어려울 때 공장을 지켜야 했고, 박수를 받을 때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더 오래 견뎌야 했다. 넘어지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기에 오늘의 이니스트에스티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김 회장이 지금 다시 바라보는 곳은 제약산업의 뿌리인 원료의약품이다.

이날 김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오래 머문 대목도 원료였다. 특정 품목의 개발과 원료 전환, 국내 제약사들과의 협력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원료 수급의 어려움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값싼 해외 원료를 가져와 완제를 생산하는 방식에만 의존해서 우리 제약산업이 언제까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식이 그의 말 속에 묻어났다.

특히 당뇨병 환자의 만성 신장질환과 심혈관 위험 감소에 사용되는 피네레논 계열 원료 개발 이야기에 이르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국내 제약사들과 개발 및 공급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나는 물었다.
“그 시장이 얼마나 됩니까?”
그는 적지 않은 시장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 귀에 더 크게 들어온 것은 시장 규모가 아니었다.
“우리 원료로 해보자.”
그 말이었다.

제약산업에서 원료는 좀처럼 주인공 대접을 받지 못한다. 신약 허가나 기술수출처럼 수천억원, 수조원이라는 화려한 숫자가 붙지도 않는다. 일반 소비자가 원료의약품 생산회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원료가 멈추면 약도 멈춘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공급망이 한번 흔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험했다. 지정학적 갈등과 각국의 자국 산업 보호 움직임까지 겹치면서 의약품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문제는 단순한 원가 경쟁을 넘어 국가 보건안보와도 연결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니스트에스티가 과거 방식의 원료의약품 회사에 머물려는 것은 아니다. 제네릭 원료의약품에서 고부가가치 API와 항암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일본을 비롯한 해외시장을 개척해온 회사가 이제 원료의약품에서 항암제, CMO·CDMO를 거쳐 ADC와 신약 분야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

제2공장은 그 변화의 중요한 기반이다. 단순히 고객이 주문한 원료를 생산해 공급하는 데서 벗어나 제약·바이오기업의 개발 초기부터 공정을 함께 고민하고 임상과 상업생산까지 연결하는 파트너를 지향한다. 항암제와 ADC 같은 고난도 분야까지 제대로 연결된다면 이니스트에스티의 정체성도 ‘원료를 만드는 회사’에서 ‘신약 개발과 생산을 함께하는 회사’로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쉬운 길은 아니다. 항암제와 CDMO, ADC 모두 세계의 강자들이 뛰어든 시장이다.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인력, 까다로운 품질관리와 글로벌 GMP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오늘 개발한다고 말한 원료가 모두 제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논의 중인 협력이 모두 계약으로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김국현 자신이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도전이 더 김국현답다는 생각도 든다. 젊어서 해남을 떠나 목포를 거쳐 서울로 올라왔을 때도 앞날을 보장해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제약회사에서 현장을 배우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없이 부딪치고 돌아가면서도 그는 결국 약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승부는 가격으로 중국과 인도 업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품질로 선택받는 원료를 만드는 데 있다. 국내 완제회사와 제품을 함께 개발하고 해외시장에 공급하면서 더 멀리는 신약과 항암제의 개발·생산까지 연결하는 것이다.

가격에서 기술로, 국내에서 세계로, 원료 공급자에서 개발·생산 파트너로.
나는 그것이 김국현이 그리고 있는 이니스트에스티의 다음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제약산업도 비슷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에서는 AI 신약개발과 글로벌 임상, 기술수출을 이야기한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공장과 원료, 품질과 공급망이라는 오래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화려한 신약도 원료 없이는 만들 수 없고 세계적인 기술이 있어도 제대로 생산할 공장이 없다면 약이 될 수 없다.

원료 국산화 역시 애국심만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국산 원료를 써달라고 호소하기 전에 해외 제품과 경쟁해 선택받을 수 있는 품질과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처음부터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원료를 만들어야 진짜 산업이 된다.

그런데 이날 저녁 나는 사업 이야기만 듣고 온 것은 아니다.

김 회장은 만날 때마다 내 건강부터 챙기는 사람이다. 얼굴빛이 조금 좋지 않아 보여도 한마디 하고,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업 이야기를 오래 나누는 친구보다 “건강은 괜찮으냐”고 먼저 묻는 사람이 더 고맙다.

그런 김 회장도 올해 담낭결석으로 담낭을 떼어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이 터졌다. 나도 이미 담낭을 떼어냈으니 이제 둘 다 말 그대로 **‘쓸개 없는 놈’**이 된 셈이다.

젊었을 때는 간 큰 놈이 세상을 움직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보니 쓸개가 없어도 잘만 산다. 오히려 서로 건강을 묻고 걱정하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김 회장과 나는 만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건강하게 99세까지 삽시다.”

예전에는 웃으며 던지는 덕담이었다. 이제는 조금 다르다. 한 사람은 평생 기자로 살았고 한 사람은 평생 약을 만들며 살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머리에는 흰빛이 늘었고 몸에서는 하나둘 부품도 빠져나갔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 써야 할 기사가 있고, 김국현에게는 아직 만들어야 할 약이 있다.

약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GMP와 원료의약품을 지나 항암제와 CDMO, ADC까지 갔다. 한국 제약산업의 미래를 놓고 제법 거창한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산업의 거대한 청사진이 아니었다.

평생 약업계에서 살아온 한 사람이 여전히 새로운 공장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만들 약을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늘 내 건강부터 챙겨주던 그 사람과 이제는 나란히 ‘쓸개 없는 놈’이 됐다는 사실이 왠지 우습고 정겹다.

김 회장님!
이제 우리 둘 다 쓸개도 없으니 욕심은 조금 덜 부리고, 웃음은 조금 더 늘리고, 서로 건강이나 잘 챙겨 99세까지 쌩쌩하게 살아요.

그럴려면,
그때까지 나는 기사를 쓰고, 김국현회장은 약을 만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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