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27일 오후 6시께, 수원 나주집에 모처럼 반가운 사람들이 모였다. 국내 중견 제약기업으로 성장한 알리코제약 이항구 회장을 비롯해 국내 원료의약품 생산업체 이니스트에스티 김국현 회장, 전 식품의약품안전처 국장 등 오랫동안 약업계에서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제약산업 현안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런저런 세상사로 이어졌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대화가 끊긴 순간이었다.
이항구 회장이 손가방을 열더니 작은 상자를 꺼내 일행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곧이어 소주에 정체 모를 액상을 넣고 흔들었다. 투명하던 소주는 어느새 갈색 옷으로 갈아입었고, 그렇게 변한 소주병이 테이블 한가운데 보란 듯이 자리를 잡았다.
‘도대체 뭘 넣은 거야.’
조금 전 건네받은 조그만 제품 포장을 들여다봤다. 맨 위에 적힌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음주 전후 숙취해소.’
그 아래 큼지막하게 적힌 이름은 ‘다깼지’였다.
이름부터 재미있었다. 나는 곧바로 이 회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제품을 만들 생각을 했느냐, 개발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느냐고. 질문을 이어가자 그가 들려준 숙취해소 제품 탄생의 비밀은 뜻밖에도 연구소나 회의실이 아니라 전북 남원의 처가댁에서 시작됐다.
이항구 회장은 제약업계에서 약주를 즐기는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다. 비즈니스 때문에 거의 매일 저녁 술자리를 갖지만 나름의 원칙도 있다고 했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소주 한 병 반을 크게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술의 양보다 횟수였다. 술자리가 연일 이어지다 보면 다음 날까지 숙취가 남는 날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중에 나와 있는 숙취해소 음료도 이것저것 꽤 마셔봤을 터다. 술을 즐기다 보니 숙취에 좋다는 제품을 직접 찾아 먹어보고 효과도 몸으로 느껴봤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몸을 대상으로 한 ‘개인 임상’도 적지 않게 해본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처가가 있는 전북 남원을 찾았다. 처가 식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그날은 자신의 ‘한 병 반 원칙’을 넘어섰다. 그래서 그랬는지 다음 날 아침 머리는 무겁고 정신도 맑지 않았다. 잠시 후 평소와 다른 사위의 모습을 본 처가댁 식구가 따뜻한 갈색 물 한 잔을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받아 마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낌이 달랐다고 한다.
“이게 뭡니까?”
대답은 소박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아 집 주변에 자생하는 벌나무를 조금 베어다가 물에 넣고 달였어요. 왜, 이상해요?”
그 한마디가 이항구 회장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회사 개발부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벌나무, 특히 남원 지역의 벌나무가 숙취해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한번 제대로 조사해보라.”
처가댁에서 사위를 걱정해 끓여준 차 한 잔이 제약회사의 연구개발 과제가 된 순간이었다.
이후 이 회장은 개발회의 때마다 연구 진행 상황을 직접 챙겼다고 한다. 자료가 쌓이고 연구가 이어질수록 제품화에 대한 확신도 커졌다. 그렇게 3년여의 개발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산겨릅나무, 이른바 벌나무 추출액을 주원료로 한 액상 스틱형 숙취해소 제품 ‘다깼지’다. 회사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다깼지’는 벌나무 추출액에 헛개나무열매추출물, 밀크씨슬추출물, 아스파라긴산, 벌꿀, 타우린 등을 더해 2023년 시장에 나왔다.
여기서 이야기는 단순한 ‘처가댁의 민간 경험담’에 머물지 않는다. 제약회사가 만든 제품답게 경험을 검증 가능한 과학적 근거로 바꾸는 과정이 뒤따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23년 ‘숙취해소 표시·광고 실증을 위한 인체적용시험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2025년 1월 1일부터 일반식품에 ‘숙취해소’ 관련 표현을 사용하려면 인체적용시험 또는 인체적용시험 결과에 대한 체계적 고찰 등을 통해 과학적 실증자료를 갖춰야 한다. 관련 표시·광고 역시 자율심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제도가 본격 시행된 뒤 식약처가 내놓은 결과도 눈길을 끈다. 식약처는 지난해 6월 숙취해소 표시·광고와 관련해 39개 업체, 80개 품목이 실증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숙취해소’라는 표현도 이제 단순한 경험담이나 광고 문구만으로 내세울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알리코제약도 ‘다깼지’에 대해 인체적용시험을 진행했다. 회사는 해당 시험을 통해 숙취해소 관련 기능성을 실증했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제품 포장에 선명하게 적힌 ‘음주 전후 숙취해소’라는 짧은 문구는 단순히 눈길을 끌기 위해 붙인 광고 카피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이 회장에게 들은 바로는 ‘다깼지’가 이제 국내시장을 넘어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등 중남미 시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전북 남원의 처가댁에서 건네받은 벌나무 차 한 잔에서 출발한 제품이 이제 ‘K-숙취해소’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날 이 회장은 한 가지 아쉬움도 털어놓았다.
“나는 원래 ‘다깼지?’라고 하고 싶었어요.”
물음표(?) 하나였다.
듣고 보니 재미있다. ‘다깼지’는 단정이지만 ‘다깼지?’는 술 마신 다음 날 친구에게 건네는 말 같다. “어때, 이제 다 깼지?” 하고 말이다. 제품 이름 하나에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의 익살이 묻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제품보다 사람을 생각했다. 기업의 신제품은 흔히 시장조사와 연구개발, 투자와 마케팅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물론 ‘다깼지’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제품이다. 하지만 모든 상품의 시작이 거창한 연구실이나 회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때로는 가족을 걱정해 건넨 따뜻한 물 한 잔이 누군가의 호기심을 깨우고, 그 호기심이 연구로 이어져 하나의 제품을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늦은 밤, 만필의 끝자락을 정리하려는 순간 엉뚱한 생각이 하나 들었다. 3년쯤 뒤 다시 이항구 회장에게 ‘다깼지’의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세계시장의 높은 장벽을 어떻게 ‘다 깨셨습니까’. 그리고 ‘K-숙취해소’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까.”
그때 이 회장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수원의 가을 저녁,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다깼지’ 이야기로 웃음을 나누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30년 가까이 약업계라는 한길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해온 사람들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날만큼은 소주 한 병과 ‘다깼지’ 하나가 그 오랜 인연을 다시 한자리에 묶어놓았다.
벌나무 차 한 잔서 시작된 '다깼지'가 어디까지 갈지 아직 모른다. 다만 3년 뒤쯤 다시 만났을 때 이항구 회장이 웃으며 “세계시장도 다 깼지”라고 말할 수 있기를, 그때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기사로 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