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남동 사옥으로의 이전을 계기로 나는 동생 김경호에게 보령약국의 경영을 완전히 일임하였다. 보령제약의 모체가 되었던 보령약국의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은 오직 제약에만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와 각오 때문이었다. ‘청년 보령’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길에 나는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 해 10월 1일의 창립 14주년 기념식은 자연스럽게 사옥 이전을 기념하는 행사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나는 이날 기념식에서 “시련을 이겨낸 그 힘과 정열로 새로운 ‘청년 보령’을 세우고 다져나가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청년 보령’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청년’은 비단 젊은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이 청년다울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진취적인 영정과 의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젊고 건장한 세대라 할지라도 영정과 의지, 그리고 꿈이 없다면 그는 이미 무기력에 빠진 노인에 다름 아닐 것이요, 반대로 아무리 늙고 왜소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꿈을 이룰 진정한 열정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이 아닌가. 오직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그 신념과 열정만으로
원남동으로의 사옥 이전은 안양공장의 수해로 인한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당시, 회사 전체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사준비를 하면서도 직원들은 지난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의지로 회사 발전에 최선을 다할 각오를 다졌다. 따라서 그 자세야 어떻든 우리에게 원남동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명당이 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종업원들의 노고와 각계의 도움으로 수해를 입은 안양공장은 빠른 시일 내에 복구되어 갔다. 수해를 입은 지 불과 한 달만에 일부 생산라인을 가동시키는 등 공장 가동을 정상화시켜가는 가운데 1977년 9월에는 본사 사옥을 이전했다. 보령약국 근처에 있던 사옥은 그 위치와 구조상 불편한 점이 많았던 데다, 보령약국 근처에 있다보니 일반인들이 약국과 제약을 동일시하는 불합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새 사옥은 원남동(苑南洞) 66-21번지에 위치한 콘크리트 골조 5층 건물이었는데, 원래 동광약품(東光藥品)이 사옥으로 사용했던 것을 우리가 매입한 것이었다. 이로써 보령제약은 1963년 출범 당시부터 사용했던 종로 사옥을 떠나 14년만에 새로운 원남동 시대의 막을 올렸다. 새 사옥이 자리 잡은 원남동은 1946년에 생긴 행
그 일들은 쉽게 눈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 모두를 다시 일어서게 한 값진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우리는 예상을 훨씬 앞당겨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었으며, 피해 복구에 허비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수해를 당한 그 해에 전년대비 22.2%의 성장을 실현할 수 있었다. 피해조사단의 예상보다 8개월이나 앞당겨 수해복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기적 같은 일이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의 힘이 없었다면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니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은 느낌을 가질 수도, 판단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사실감 있으며, 크기와 무게와 가치까지도 살필 수 있다. 휴일도, 밤낮도 없이 피해복구에 매달리고 있는 사원들. 하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는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양공장의 수해와 극복과정을 통해서 나는 우리에게 잠재해 있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수해가 남기고 간 자국'이라는 동판에 강우량이 4
안양공장의 수해는 참담했으나, 그 결과 우리는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수해 복구 작업을 통해서 전 사원이 하나로 뜻을 모을 수 있었고, 보령제약이 그동안 약업계와 소비자들 사이에 뿌린 씨가 어떤 결실을 맺고 있었는지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의지를 확인한 정부에서도 긴급 융자금 지원, 예외적인 증축허가, 제품 및 원료 피해액 전액 인정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아울러 약업계가 보여 준 협조와 성원도 큰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엄청난 수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약업인들은 직접 복구 현장까지 찾아와 성금과 성품을 내주기도 했고, 격려의 전문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때 거의 모든 제약회사가 예외 없이 보령제약의 수해를 함께 마음 아파하고 격려의 뜻을 보내왔으며, 업계의 중진 한 분은 피해 복구비를 직접 교섭해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약업인들의 이와 같은 성원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수해를 입은 그 해 여름 무던히도 더웠으나 전직원이 휴일도 잊고 밤낮으로 수해복구에 매달렸다. 전국의 주요 거래선들 또한 우리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도매상들은 선금을 주고 약품을 매입해 주었고, 소매약국들은 잔고(殘高)를
창업 이래 크고 작은 고난을 숱하게 겪고 또 헤쳐 나온 나였지만 수마가 할퀴고 간 안양공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만큼 허망함과 좌절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내가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버린다면 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원들은 나보다 몇 갑절의 허망함과 좌절감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근의 여러 공장이나 제약회사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문제는 유독 우리의 피해규모가 그 중에서도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일단 안양공장이 입은 직접적인 피해액은 5억원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피해액을 의미했고, 완제품피해와 영업공백으로 인한 손실까지 감안하면 그 피해액은 12억원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피해였다. 수해를 당하기 전 해인 1976년 우리는 전년 대비 36.6%라는 고성장을 이룩하며 전 사원이 업계의 정상을 향해 매진하고 있었다. 또한 신약개발이나 영업 활동 면에 있어서도 모든 사원들이 강한 의지와 자부심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느닷없이 닥친 수해가 우리 모두에게 준 충격과 실망감은 더욱 큰 것이었다
수해를 당한 첫날 아침, 용각산이며 구심 등의 제품들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자 사원들은 옷을 입은 채 가슴까지 차는 물속으로 들어가 플라스틱 바구니에 제품을 주워 담았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결연한 의지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내 스스로에게 굳은 다짐을 하였다. 1977년 7월 8일, 안양공장이 신축된지 3년째가 되면서 성장가도를달리고 있던 우리는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된다. 30년만에 처음이라는 집중폭우로 인해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비는 그 전날 저녁부터 집중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경기지방을 강타한 폭우는 안양공장이 위치한 안양시와 시흥군 일대에 집중적으로 쏟아져 저녁 8시 무렵에 안양 시내는 이미 무릎까지 물이 차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내린 비는 420mm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 집중호우로 특히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바로 수원과 안양, 시흥일대였다.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1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재민만도 8만여명에 이르렀다. 수원과 인천 사이의 철도는 두절되었으며, 농경지는 마치 바다처럼 변해버렸다. 7일 저녁 호우가 내리기 시작했을 무렵 안양공장에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당직 근무자들만이 공장을 지키고 있었
사람에게 있어서 자질은 물론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자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의욕과 노력이 아닐까. 인간의 내면에 불타는 의욕과 줄기찬 노력은 그 어떤 장애도 극복시키고 마는 엄청난 힘을 가진다. 나는 당시 항생물질 합성 성공이나 기술 수출이 우리 사원들의 자질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스스로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몰두한 의욕과 노력이 바로 우리의 성공요인이자 가장 큰 힘이었다. 항생제 개발의 대명사로 불리는 브리스톨사의 신제품 항생제를 발매하게 된 것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항생물질 합성에 성공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우리의 연구진은 그동안 원료 의약품의 합성과 항생제 개발에 역점을 둔 연구개발사업을 꾸준히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브리스톨의 우수한 항생제들을 도입 발매하면서 이 같은 연구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었다. 당시 원료의약품의 개발은 1977년부터 시작된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포함되어있던 사항이었고,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지원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원료 의약품의 생산은 물론 의약품 생산에 기초적으로 필요한 원료의 합성에 주력하게 되었는데, 그
이렇듯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제약회사와 손을 잡고 항생제를 생산해냄으로써 우리는 당초 치료 의약품을 통해서 대(對)병원 영업을 활성화시키려 했던 전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약개발을 향한 우리의 의지가 더욱 확고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약생산은 안양 공장의 가동과 더불어 활기를 띠다가 1977년 2월 기관지 천식 치료제 ‘크리날’정을 발매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어 고농도 복합 활성 유산균 제제로 정장과 소화제를 겸한 ‘비오스포라’과립이 생산되었고, 이듬해인 1978년 초에는 브리스톨 마이어즈사의 최신 항생제인 ‘세파트레스’주사제와 ‘파리트렉스’드라이 시럽 캅셀이 생산 발매되었다. 이 무렵 가장 의미가 큰 것 가운데 하나는 보다 다양한 제품에 걸쳐 브리스톨 마이어즈사와의 기술 제휴가 이루어진 점이었다. 바파린 한 품목만을 생산해 왔던 한계를 벗어나 세파트렉스와 파리트렉스를 발매함으로써 명실 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항생제를 국내에 소개하게 된 것이다. 브리스톨과의 기술제휴는 그람양성균 치료제인 항생제 ‘디크록스’캅셀과 주사제, 1972년에 새로 개발한 최신 항생물질로 넓은 항균력을 지닌 항생제 ‘아미킨’등의 신제품으
당시 나의 목표는 치료 의약품의 개발과 생산이었다. 따라서 이노데라, 순천당, 알미랄 등 세 회사와의 제휴를 통한 일련의 제품생산은 그 같은 나의 의지를 실현시켜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다. 안양공장에서 신약 생산을 위한 본격적인 추진 작업이 시작된 것은 1976년이었다. 겔포스의 생산발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이노데라사와 혈행기능개선제 ‘스트라텐’, 항원충(抗原蟲) 및 항진균(抗眞菌)제제인 ‘아트리칸’을 도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어 일본 진촌순천당(津村順天堂)과 여성 양약 중장탕 ‘라모루’의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또 같은 해에 스페인 알미랄사와 항생제 ‘울트라렉신’의 도입을 합의함으로써 차츰 제휴선을 확대해 나갔다. 아울러 이미 1973년에 기술 제휴를 맺은 미국 브리스톨 마이어즈사의 진통제 ‘액세드린’과 어린이 비타민 ‘팰즈’를 생산하기 시작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정제의 다각화를 이루어갔다. 먼저 스트라텐은 63년의 역사를 지닌 프랑스의 대표적인 제약회사의 하나인 이노데라사의 특허품으로서 그간 화이자사가 닦아 놓은 기반을 파고들어 시장 점유율 30%를 차지하고 있는 유명제품이었다. 역시 특허품인 아트리칸은 이노데라사가 합성한 치아
‘조직의 힘은 팀웍에서 온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사풍(社風)을 조성하고자 했던 나로서는 모든 사원들이 스스로 보령의 주체라는 인식전환을 해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것은 겔포스의 히트보다도 더 값진 소득이었다. 기존 제품과 차별화를 두고자 했던 당시 마케팅 전략 또한 겔포스 돌풍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힘이었다. 겔포스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안양공장이 가동된 1975년 6월이었다. 프랑스의 비오테락스와 기술제휴를 체결한 것이 1972년 3월이었으니까 기술제휴 후 3년이 넘어 발매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은 겔포스가 다른 제품에 비해 더욱 신중하고도 철저한 기술도입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녹슨 철모에 오린지색의 호랑나비로 평화를 상징하는 모습을 담은 겔포스 광고.앞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위장약은 그 어느 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