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영칼럼/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다시 한 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상장 제약사를 비롯해 중견·중소 제약기업들 사이에서 내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미 일부 기업들은 조용히, 그러나 급박하게 사업계획 재조정에 착수했다. 이는 경기 변동이나 일시적 경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될 정부의 약가제도 개편이 산업 전반에 미칠 충격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제약바이오협회를 비롯한 주요 제약단체들이 참여한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가 오는 22일 긴급 기자회견을 예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산업계가 체감하는 위기의 깊이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이날 비대위는 정부 약가개편안이 적용될 경우의 예상 피해 규모와 함께, 제약산업 생태계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경고할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통해 13년 만에 약가제도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오리지널 대비 53.55% 수준이던 복제약 약가를 40%대로 대폭 인하하고, 다수 제네릭이 등재될 경우 단계적으로 가격을 끌어내리는 ‘프라이스 스텝다운’ 구조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이다. 여기에 희귀질환 치료제 등재 절차 간소화, 비용효과성 평가 기준 유연화, 혁신형 제약기업 지원 강화 등의 정책도 병행된다.
문제는 이러한 개편이 산업 현실을 충분히 고려한 ‘정교한 수술’이 아니라, 지나치게 급격한 ‘일괄 처방’에 가깝다는 점이다. 특히 중소·중견 제약사들에게 제네릭 약가는 단순한 수익 항목이 아니라 연구개발과 고용, 설비 투자를 지탱하는 생명선이다. 제네릭 약가의 구조적 인하는 곧바로 매출 감소와 현금흐름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연쇄적으로 R&D 투자 축소와 사업 위축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혁신 신약 개발을 장려하겠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단기 현금흐름이 막히는 상황에서 장기 R&D 투자를 감내할 수 있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번 개편은 ‘혁신을 장려한다’는 명분 아래, 다수 기업의 연구 역량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역설을 낳을 수 있다.
더욱이 희귀질환 치료제의 등재 기간 단축과 가격 협상 유연화는 외국계 제약사의 국내 시장 진입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환자 접근성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국내 기업에게는 경쟁 심화라는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한다. 정부가 강조하는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과 국산 의약품 경쟁력 강화 역시 충분한 보상과 지속 가능한 지원 체계 없이는 선언적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다.
약가제도 개편은 국민의 약제비 부담 완화와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공공적 목표를 담고 있다. 그 취지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산업의 체력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결국 공급 기반을 약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환자와 국민에게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2026년은 단순한 제도 시행의 해가 아니다. 국내 제약산업의 존립 구조와 미래 경쟁력을 가늠하는 분수령이다. 정부는 ‘속도’보다 ‘예측 가능성’을, ‘일괄 인하’보다 ‘차등적·단계적 접근’을 선택해야 한다. 산업계 역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비용 구조 개선과 선택과 집중 전략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약가 인하는 정책일 수 있지만, 산업 붕괴는 정책 실패다. 정부와 산업계 모두가 이 경고를 가볍게 흘려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