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는 중독이고 폐암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책임을 묻지 않은 판결

  • 등록 2026.02.06 06: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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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 이은주 대변인 “흡연의 중독성과 폐암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예방 정책 정당성 약화"

서울고등법원이 최근 담배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흡연의 중독성과 흡연이 폐암을 포함한 중증 질환의 주요 원인이라는 의학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담배회사에 대한 법적 책임은 끝내 부정했다. 판결문이 스스로 확인한 사실을 마지막 문턱에서 외면한 셈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반복적으로 “흡연 외에도 유전, 환경, 직업력, 생활습관 등 다양한 위험요인이 존재할 수 있으며, 각 요인의 기여도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불확실성을 근거로 흡연이 질병 발생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질병을 이해하는 현대 의학의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의학에서 폐암은 단일 원인 질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위험요인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흡연은 폐암 발생 위험을 수 배 이상 증가시키는 가장 강력한 위험요인이다. 이는 수십 년간 축적된 역학 연구와 임상 경험으로 확립된 사실이며, 이를 부정하는 의학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법원은 “개별 환자에게서 흡연이 폐암의 직접적이고 유일한 원인임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이에 대해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 유광하 이사장(건국대 호흡기내과 교수)은 “현대 의학의 인과성 개념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판단”이라며 “질병의 원인은 대부분 확률적이고 복합적이다. 법원이 요구한 수준의 ‘절대적 개별 인과성’은 의학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며, 이는 사실상 어떤 공중보건 책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판결문이 책임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축은 ‘자기책임’ 논리다. 재판부는 니코틴의 중독성을 인정하면서도,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담배회사의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중독은 선택의 자유를 침식한다. ‘알고도 피웠다’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면,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의존 역시 모두 개인의 의지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이는 현대 사회가 중독을 질병으로 다뤄온 이유를 법원이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니코틴 중독은 국제질병분류(ICD)에 등재된 질환이다. 판결문 역시 흡연의 해악이 오랜 기간 사회적으로 인식돼 왔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법은 중독을 ‘의지로 통제 가능한 선택’으로 간주했다. 수차례 금연 실패를 반복하는 환자들의 현실은 이러한 법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니코틴은 강력한 의존성을 유발하며, 특히 청소년기 흡연은 평생 흡연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수많은 연구가 이를 반복적으로 확인해 왔다.

담배의 유해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 역시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다. 경고 문구의 존재가 중독물질의 설계와 판매 책임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배회사는 중독성을 강화하고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제품 설계와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정교화해 왔다. 이 역사적 맥락을 외면한 채 모든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의와 거리가 멀다.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 이은주 대변인 이사는 “이번 판결이 남길 사회적 파장은 작지 않다”며 “흡연의 중독성과 폐암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예방 정책의 정당성은 약화되고 피해 회복의 길은 봉쇄된다. 사법 판단이 의학적 상식과 동떨어질 때, 그 비용은 환자와 사회 전체가 떠안게 된다”고 우려했다.

담배는 중독 물질이고, 폐암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이미 과학적으로 결론이 난 문제다. 이번 판결이 남긴 가장 큰 문제는 입증 책임을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수준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사법부가 과학이 도달한 지점을 끝내 따라오지 못한다면, 법은 더 이상 사회적 책임을 묻는 도구로 기능하기 어렵다.

김용발 기자 imph7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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