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인하의 함정...“독일·영국의 실패를 되풀이할 것인가”

  • 등록 2025.12.30 09: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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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약가를 큰폭으로 인하하면, 내일의 신약은 없다”..“보험재정은 살리고 제약바이오산업은 죽일 것인가”

노재영칼럼/재정 절감의 칼날이 한국 제약바이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약가인하 제도 개편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를 위한 ‘합리적 조정’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의 숫자는 냉정하다. 이번 개편안이 원안대로 시행될 경우,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은 투자 축소, 수익성 붕괴, 고용 감소라는 삼중고에 직면하게 될수도 있다. 이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직접 밝힌 예측 가능한 미래다.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가 국내 제약바이오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기등재 의약품 약가가 최초 산정가의 40%대로 인하될 경우, 59개 기업에서만 연간 1조 2천억 원 이상의 매출 손실이 발생한다. 기업당 평균 손실은 233억 원, 특히 중소기업의 매출 감소율은 10%를 넘어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약가 인하는 곧바로 연구개발(R&D) 중단으로 이어진다. 응답 기업들은 2026년까지 연구개발비를 평균 25% 이상 줄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설비투자는 그보다 더 가혹하다. 평균 32% 감소, 중소기업은 절반 이상을 포기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경영 판단이 아니라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산업의 구조적 신호다.

고용은 가장 먼저 희생된다. 약가 개편안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조사에 응답한 기업들만 해도 1,691명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중견기업의 인력 감축률은 12%를 넘는다. 제약바이오산업은 고급 인력이 핵심인 지식기반 산업이다. 숙련된 연구자와 생산 인력이 현장을 떠나는 순간, 산업 경쟁력은 회복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결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외국의 실패 사례는 이미 충분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독일은 2010년대 초반 강력한 약가 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단기적으로는 보험 재정이 안정되는 듯 보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중소 제약사의 도산이 잇따랐고, 일부 필수의약품은 공급 중단 사태를 겪었다. 결국 독일 정부는 혁신 신약과 자국 생산 의약품에 대해 약가 규제를 완화하고, 연구개발 인센티브를 재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역시 약가 억제 정책의 후유증을 겪었다. NHS의 강력한 약가 압박은 제약사의 투자 위축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영국은 한때 유럽의 제약 연구 허브 지위를 프랑스와 독일에 내주었다. 최근 영국 정부가 제약·바이오 산업 육성을 국가 전략으로 재정의하며 세제 혜택과 약가 제도 개선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미국은 다른 길을 택했다. 약가 논란 속에서도 혁신 신약과 연구개발에 대해서는 명확한 보상 구조를 유지했다. 그 결과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의 상당수가 미국에서 탄생했고, 제약바이오 산업은 국가 전략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약가를 무작정 누르기보다, 가치에 따른 보상을 선택한 결과다.
한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약가를 단순한 재정 절감 수단으로만 접근한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산업 붕괴와 미래 경쟁력 상실로 되돌아올 것이다. 설문에 응답한 기업의 75%가 제네릭 의약품 출시를 취소하거나 보류하겠다고 답한 현실은, 곧 의약품 공급 불안으로 국민에게 되돌아갈 가능성을 시사한다.

약가 정책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 정책이자, 안보 정책이며, 미래 정책이다.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의약품 자급과 국내 생산 기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 교훈을 불과 몇 년 만에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약가 개편안은 과연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고려한 결정인가, 아니면 단기 재정 수치에 매몰된 선택인가.

약가를 깎는 것은 쉽다.
그러나 무너진 산업을 다시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계적·차등적 접근과 산업 경쟁력을 살리는 정교한 제도 설계다.
제약바이오산업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그 투자를 외면하는 정책은, 결국 국가의 미래를 깎아내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노재영 기자 imph7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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