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산 김씨 문안공파 38세손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의 법도 아래 자라났으며 보학(譜學)의 중요성을 누누이 들어왔다. 이러한 환경은 나의 심중에까지 깊이 뿌리 내려 광산 김씨의 자손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고, 광산 김씨 일가를 위한 일이라면 내 모든 여력을 다하여 힘써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金氏이고, 김씨는 모두 280여개의 본관이 있을 정도로 번창하다. 그 중에서도 광산 김씨 일가는 김씨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우리 광산 김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및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를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 대대로 최고의 가문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담긴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 전 시대에 걸쳐 학문이나 관위(官位)에서 두드러진 조상을 둔 집안이 아니
나의 아내는 스물세 살에 스물일곱 살인 나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낳아 기르며 자상한 어머니로, 성실한 내조자로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해 왔다. 이만큼 가정을 꾸려오고 병원과 대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지런함 때문이었다.1954년 결혼할 때 나는 대전보건소에서 근무하였고, 전후 잿더미 위에서 모든 것이 다 부족하고 궁핍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장 어려웠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결혼한 지 일 년 후에 장녀 용애를 출산하였고 첫딸에 대한 사랑과 처에 대한 정은 더욱 더 깊어져 갔다. 결혼 생활 3년여 되는 해 나는 가족의 생활 대책도 세워놓지 못한 채 도미(渡美) 유학길에 올랐다. 여유가 없는 생활이다 보니 가족이 걱정되면서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경상학관 앞에서 부인 김영이여
요즘 어느 가정에 가나 크고 작은 가훈이 문패처럼 걸려 있다. 한때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을 벌였던 여파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어 혈통과 사회 규범, 가정 내의 생활 규범과 가족의 화평 등을 강조해 왔다. 가훈은 한 가족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도리와 삶의 철학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가훈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선진 서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 주변에선 우리 집 가훈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 하는 이가 많다. 가장인 내가 나름대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기에 거창한 가훈을 내걸고 있는 줄로 착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선조께서 거유(巨儒)이기 때문에 공맹(孔孟)의 어록(語錄) 같은 걸 인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김총장의 장모가 세운 대전 보문산에 있는 고촉사
나는 시카고의 일리노이 대학원을 마치고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학하다 1959년 9월, 3년 3개월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막상 귀국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처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딸 용애는 얼마나 컸을까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시바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돌아오는 여정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오레곤 주를 거쳐 북동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다시 한미재단이 알선해 준 배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3년 전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딜 때는 서해안 남단의 롱비치 항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북단의 시애틀 항에서 떠나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행 미군 수송선에 타보니 미국에 올 때는 장교 전용 일등실이었는데 이번엔 배 밑바닥에 있는 사병 침대에서 식사도 화장실도 사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근무에 열중하다 1년이 거의 되었을 무렵 하루는 의무부장이 불러 가 보았더니 6개월 코스의 일리노이대학 안과대학원에 갈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선뜻 가고 싶다고 대답했고, 의무부장의 추천으로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 안과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시카고는 뉴욕에서 2시간 거리로 미시간호에 연해 있으면서 시내에 잘 발달된 수로가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는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물론 수업료, 숙식비, 월급 등 제경비를 병원에서 대주어 별다른 불편 없이 대학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하루종일 수업과 실습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복습과 야근을 하고 나면 몸이 몹시 피곤했다. 미국 유학중 김총장은휴가철엔 미국의 유명한 곳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나섰다.그러나 나는 공부의 연장도 될겸 돈도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뉴욕 맨해탄의 ‘그랜드 스테이션’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맨해탄의 거리는 듣던 대로 온통 하늘을 치솟을 듯 솟아 있는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나는 사람들도 흑인들이 많았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든 채 노란 택시를 타고 뉴욕 업타운에 위치한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 안내데스크에서 안내해준 대로 인턴 숙소에 짐을 풀고 즉시 옷을 갈아입고 나의 근무지인 일반외과로 갔다. 7월 1일이 인턴 근무 시작인데 7월 10일에 도착하였으니 10일이나 늦은 상태였다. 우리 한국사람들 같으면 먼 곳에서 왔으니 좀 쉬고 다음날부터 근무하라는 배려가 있을 법한데 미국 사람에게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뉴욕에서의 인턴시절.바로 그때 구내 방송이 나오는데 직감적으로 나를 찾는 방송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도착했기에
당시 대전보건소는 미국 정부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식 예방의학 제도를 도입하여 예방주사, 모자보건,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주로 실행하였다. 나는 대전보건소의 첫 소장으로 근무하던 중 마침 미국 병원에 인턴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잘 발달된 선진 의학을 배워올 수 있다는 벅찬 기대에 정성스럽게 서류를 갖추어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마음을 졸이며 그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마침내 뉴욕에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당시는 해외유학을 가려면 정부에서 시행하는 해외유학 자격시험을 보아야 했는데 나는 도미 유학의 꿈을 안고 친구들 몇 명과 저녁이면 토니 박사라는 선교사로부터 영어 교습을 받아왔기 때문에 외무부에서 유학생들을 상대로 치르는 영어시험에 쉽게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김희수총
9ㆍ28 수복 이후 국군이 평양을 거쳐 압록강가에 이르는 등 전세가 반전되면서 사회는 폐허 속에서나마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나는 전주에서 1년을 근무한 뒤 1952년 10월 대전구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전국에 15개의 보건소와 수백 개의 보건진료소가 설치됐다. 미군정 하에서 처음 세운 서울시립보건소가 전쟁 중 파괴되는 등 의료시설이 부족해지자 전쟁 후 유엔의 지원으로 구호와 보건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 보건소, 보건진료소를 설치한 것이다. 이 때 대전구호병원은 대전시보건소가 됐고 1953년 나는 대전시보건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해 지역 주민의 건강관리를 책임졌다. 대전시보건소는 대전시 은행동에 있었는데 유엔 지원 하에 미국식 예방의학제도를 도입해 예방접종, 모자보건,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주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