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품목이나 생산량이 미미한 보령제약이 지나치게 큰 규모의 공장을 짓는 게 아니냐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규모가 결코 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장차 본격적으로 외국과의 기술제휴에 들어갈 경우 어느 정도의 생산능력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 대처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60년대 당시 국내 제약업계는 의약품 생산면에서는 그런대로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연구와 개발면에서는 아직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이 같은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중의 하나가 바로 외국과의 기술제휴였다. 물론 정부차원에서 국산의약품 생산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 기술이나 상표가 그 동안 외제 선호로 일관해온 소비자들
보령(保寧)이라는 지명이 갖는 의미가 제약회사의 이름으로 손색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안녕(寧)을 보증(保)한다, 혹은 편안함(寧)을 지킨다(保)는 그 뜻이야말로 약을 만들어 파는 회사로서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이 아닐 수 없었다.6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제약업계는 일대 조정기를 맞게 된다. 치열한 시장경제논리가 본격화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기업특성을 가진 업체만이 장래가 보장되었으며, 반대로 기존의 수준을 답습하는 낮은 제조기술과 평범한 품목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었다.즉, 항생제면 항생제, 비타민제면 비타민제, 드링크류면 드링크류 등 회사를 대표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제품이 생존의 과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1964년 이후 제약업체들이 원료 산업에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업계의 경쟁은 실로 격전을 방불케 했는데, 그 결과 1965년에 468
나는 변변한 공장도 아니요, 그렇다고 편안하게 지낼만한 집도 아니었던 연지동 193-7번지 그 시절이 너무나 소중하다. 비록 걸음마이기는 했지만 내가 운(運)이 아닌 ‘기회’를 찾아 첫 걸음을 뗀 곳이기에, 그리고 제약인으로서의 의식과 경험을 쌓게 해 준 소중한 터이기에. 업계 진출의 시험무대에서 일단 성공을 거두면서 연지동 공장에서는 ‘비타민 C'와 ’건위정‘을 이어서 생산해냈다. 나는 예전에 보령약국 시절에도 그러했듯이 이 일련의 약전품 하나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자는 결심이었다. 내 스스로 최종 출하제품을 일일이 점검하여 상표가 잘못 인쇄되었거나 용기가 잘못 만들어졌으면 즉각 폐기처분하거나 다시 만들도록 지시했다.그 결과 동영제약이 영업을 시작한 1964년의 총매출액은 약 250만원에 이르렀다. 물론 순이익은 10만원이 채 안되긴 했지만, 50
동영제약을 인수하고 난 후 나는 약전품 생산을 통해 제약인으로서의 첫 걸음마를 내딛었다. 그러나 스스로 제약인으로서의 다짐을 추스르고, 아울러 업계의 동향을 파악한 값진 시간이었기에, 곧 첫 걸음마를 떼고 당당히 큰 걸음을 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동영제약을 인수한 직후 제약업계는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관심 속에는 제약업에 뛰어든 ‘보령’의 향후 행보에 대한 경계심 또한 없지 않았던 듯 하다.도매업이 쇠퇴기에 접어든 이후 당시 제약업계는 소매약국과의 직거래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보령약국과 보령약품을 통해 든든한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의 눈이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하지만 정작 제약업계 진출의 꿈을 이루고 나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
기회를 잡고, 그 기회를 실현할 준비를 갖추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그 때가 종로 5가에 처음 자리를 잡은 지 6년째, 내 나이 31세였다. 조그만 구멍가게 수준의 약국에서 대형 소매약국으로, 그리고 다시 도매업으로 숨가쁘게 지내온 그 6년만에 나는 ‘제약업’과 첫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며, 그것은 분명 내가 꿈꾸던 기회였다. 이제 그것이 진정한 기회였음을 입증하기 위해 내 모든 땀과 노력을 쏟는 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뿐더러, 일단 왔다가도 잠시 한 눈을 팔면 그대로 놓치기 쉬운 법. 나 또한 제약업 진출 결심을 굳히자마자 곧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문제는 신규허가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50년대 후반부터 제약업계가 꾸준히 늘어나자 보건사회부에서는 새로운 허가 신청을 규제하기 시작했다.그 증가추세
언젠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남보다 운이 좋았기에 지금의 보령이 있기까지 자수성가로 올라 온 게 아닙니까?운(運)이라는 말을 두고 잠시 생각을 한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운이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약사 출신이 아닌 내가 보령약국을 운영하는 데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지만, 운이 전혀 없었다고도 할 수 없지요. 다만 나는 그게 ‘운이 좋았다’는 것과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했다’는 것과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겐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데, 난 그 기회를 잘 포착해서 지금의 보령으로 키워낸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운을 잘 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생각해보면 나는 오히려 기회에는 둔한 편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그 옛날 보령약국 시절이 더욱 소중하고 값지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그 시기에 신뢰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객들이 보여준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내 평생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그 당시에 얻었던 것이다.전 재산인 집 한 채를 팔아 약국 문을 연 1957년부터 명실 공히 대형도매약국으로 자리 잡은 1960년대 초까지 5-6년. 이 사이에 보령약국은 기대 이상의 성장을 이루었다.그 성장을 가능하게 한 것은 개업 초기에 도입한 새로운 영업방침과 판매 전략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보다 싼 가격에 고객이 원하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약품을 제공하자는 전략이었고, 그 덕분에 머지않아 보령약국은 ‘값싸고 없는 약이 없고, 친절한 약국’이라는 값진 이미지를 심을 수 있었다.중요한 것은 저렴한 가격으로 약품을 제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남다른 자금력
일단 공급가는 낮추되 전표제를 통해 판매가격만은 철저하게 지킨다는 원칙을 세우자 소비자들의 신뢰도 그만큼 커졌다. 고객이 일단 우리 약국에 들어서면 어느 약사에게 처방을 받더라도 똑같은 가격을 지불하였고, 이는 보령약국 전체에 대한 신뢰로 굳어갔던 것이다.약국개업 5년만인 1962년으로 접어들자 보령약국은 이미 국내 최대 규모의 소매약국으로 성장하였다.업계에서는 ‘종로 5가를 지나는 행인 다섯 가운데 한 명은 보령약국에 가는 손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약국 안은 항상 고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약사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보령약국의 그 같은 문전성시(門前成市)에 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 소매약국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고, 그
현금을 주고 약을 사다보면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할 수 있었고, 이것은 결국 약품의 단가를 낮추어도 적정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가격 뿐 아니라 품목이나 물량에 있어서도, 외상 거래를 하는 다른 약국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차츰 대형 도매약국으로서의 기반을 잡아가던 1958년 2월, 때마침 동생 김경호(金暻浩)가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보령약국의 새 식구가 되었다. 특히 내 자신이 약사출신이 아니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던 터라, 동생의 가세는 약국의 입장에서나 내 개인의 입장에서나 또 다른 의미와 힘이 되는 일이었다.한편 당시 제약업계에서는 신약(新藥)생산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는 추세였는데, 1955년 5,300만원에 불과했던 전체 신약 생산총액은 1956년에 1억원, 1957년에 1억3,000여
보령약국은 개업한 지 불과 5-6개월 만에 경영수지를 맞추며, 이미 대형 소매약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얻은 진정한 소득은 결코 금전적인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소득, 그것은 바로 고객들로부터의 ‘신뢰’였다.고민 끝에 내가 수립한 영업방침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소비자가 저렴하다고 느낄 정도의 가격으로 약품 값을 조정해서 판매한다.둘째, 상품의 구색을 갖춘다.셋째, 서비스에 만전을 기한다.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 방침은 어떤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든 지극히 당연한 논리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없는 물건 없이 친절하게 싸게 판다’는 것이니까.하지만 당연한 논리일수록 실제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누구나 알고는 있되 직접 실천하지는 않는 것,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