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힘은 팀웍에서 온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사풍(社風)을 조성하고자 했던 나로서는 모든 사원들이 스스로 보령의 주체라는 인식전환을 해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것은 겔포스의 히트보다도 더 값진 소득이었다. 기존 제품과 차별화를 두고자 했던 당시 마케팅 전략 또한 겔포스 돌풍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힘이었다. 겔포스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안양공장이 가동된 1975년 6월이었다. 프랑스의 비오테락스와 기술제휴를 체결한 것이 1972년 3월이었으니까 기술제휴 후 3년이 넘어 발매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은 겔포스가 다른 제품에 비해 더욱 신중하고도 철저한 기술도입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녹슨 철모에 오린지색의 호랑나비로 평화를 상징하는 모습을 담은 겔포스 광고.앞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위장약은 그 어느 때보다
1974년 10월 10일 안양공장은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준공 당시 안양공장은 제약업계 단일 공장으로서는 국내 최대였는데, 이보다도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전 공정이 자동화설비로 되어 있어 공장운영의 과학화를 실현시켰다는 것과 종업원을 위한 복지시설을 마련했다는 점이었다. 19973년 제약업계에 진출한지 만 10년째가 되는 이 해는 미래 지향적인 설계를 현실화시킨 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보령제약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대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던 결정적인 사건, 바로 안양(安養)공장의 착공이 이루어진 해였던 것이다. 안양공장의 건설은 그 동안의 축적된 힘을 모아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 보령의 의지이자 도전이었다.1967년 성수동 공장이 가동되었을 때만 해도 오히려 ‘공장규모가 필요이상으로 크다’는 우려섞
우리는 당장의 이익 추구보다는 장기적인 신뢰구축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예전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알게 된 거래처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 힘입어 우리는 결국 지방 영업소 개설로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부가적인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창사 10년을 맞은 1973년을 전후하여 매출이 크게 신장된 것은 이와 같이 지방에서의 영업성과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용각산의 성공 이후 보령제약이 꾸준히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영업사원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들 영업사원들의 활동영역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제기된 과제가 바로 지방 영업소 설치 문제였다.당시 영업이 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방영업에 투자할 인력과 관리비부담 때문이었다. 지방에 영
나는 새로 보령제약의 가족이 된 사원들에게 무엇보다 팀웍을 강조했다. 조직은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이 최고도로 발휘되어 조화를 이룰 때 무한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 결코 개인의 천재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0년대 제약업계는 주로 경력사원 위주로 영업사원을 채용하고 있었다. 물론 일부 공개채용을 실시하는 회사가 있었지만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의 업체는 제약업계의 경력을 우선하여 그에 맞는 직급을 주고 채용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제약업계의 영업이 갖고 있는 특수성 때문이었는데, 어떤 업체의 영업사원이든지 경력이 없이는 활동하기가 힘들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당시 제약업계는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보다는 영업실적 제고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단기적인 안목에서 직원을 채용하고 있
내 예상대로 발매직후부터 겔포스는 국내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고, 특히 그 약효가 탁월해서 직장인, 학생, 주부, 노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인기를 끌었다. 언제 어디서나 복용하기 편하게 만들어진 ‘주머니 속의 위장약’이자 국내 최초의 1회용 액체위장약 겔포스---그것은 새로운 보령의 미래를 여는 전령이었다.헤파리겐 발매를 전후하여 나는 또 다른 유럽의 제약 회사와 기술제휴 및 원료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1972년 3월에 협약을 체결한 프랑스의 비오테락스가 본격적인 기술제휴선 다변화전략의 세 번째 회사였다.나는 비오테락스가 생산하고 있는 다양한 의약품 가운데 특히 한 제품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겔포스(Gelfos)라는 이름을 가진 위장약이 바로 그것이었다.내가 비오테락스를 새로운 기술제휴선으로 선택한 직접적인 동기
정제(錠劑)로 되어있는 헤파리겐을 생산발매하면서 보령제약은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이 약이 갖고 있는 특수한 약리(藥理)작용을 국내에 알리는 동시에 선진국이 점유하고 있던 간장 치료제의 국내 개발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이 때의 세미나는 간장약에 대한 학술적인 성과를 도출하는 동시에 간장 질환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를 높이는 데도 큰 성과를 올렸다.기술 제휴선의 다변화를 위한 첫 단계로 우리는 세계적인 명문 의약품 생산업체인 미국의 브리스톨 마이어즈사와 기술제휴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1971년 9월 보령제약과 브리스톨은 해열 진통제 ‘바파린’과 소아용 비타민제 ‘팰즈’, 여성질환 치료제 ‘겐차 젤’등 세 품목의 기술제휴에 관한 계약을 체결,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생산준비에 들어갔다.100여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의 브리스톨은 8개
선진국의 약업계가 내게 준 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특히 신약개발을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을 목격한 후 우리의 뒤늦은 현실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연구부서의 신설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1970년 12월에 학술부(學術部)가 신설되었다. 연구하지 않는 제약기업은 머지않아 그 존재 가치를 잃을 것이 뻔했으므로 신설된 학술부는 연구하는 기업,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기업으로서의 보령제약을 상징하는 의지의 표출이었다.1967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연구과정에서 경영 전반에 관한 이론을 접한 것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경제개발계획이라는 큰 구도 안에서 한창 산업사회로 진전되어 가는 과정이었는데, 고대 경영대학원은 그런 우리 사회와 한국경제 전반에
무려 26만 통이 넘는 애용자 카드, 그 하나하나가 지금까지도 내게는 소중한 사신(私信)이다. 그 속에서 나는 거듭 이런 경구(警句)를 읽을 수 있었다.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라, 그리고 그 신뢰를 지키기 위해 더더욱 노력하라.”용각산과 구심, 기응환 등 일본과의 기술제휴로 생산한 제품들의 판매가 활발해지자 우리는 이들 세 제품의 판촉에 더욱 주력했다. 그 같은 판촉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성을 띤 것이 바로 1963년부터 시행한 ‘3원제(元制)DM(Direct Mail)’전략이었다.3원제 DM이란 고려대학교 김동기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소비자가 소개하는 제3의 구매 가능 대상자 상호간을 연결시켜 판촉에 활용하고, 동시에 체계적으로 고객을 관리하기 위한 광고전략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 회사의 전 제품에 애용자카드를 동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광고가 바로 그 유명한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멘트의 TV광고였다. 당시 인기 있었던 중견 성우 최응찬의 목소리에 실렸던 이 카피는 미세한 분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재치 있게 표현함으로써 오래도록 시중의 유행어가 되었다.당시만 해도 TV를 제외한 라디오와 신문 광고의 대부분은 제약회사의 광고로 장식될 때였다. 그만큼 약품광고가 성행하고 있었고, 소비자들은 그 어떤 제품보다 약에 대한 정보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제약회사들은 신제품이 나오면 으레 상업광고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또 실제로 광고를 하면 큰 효과를 보았다.그중에서도 보령제약은 신문과 라디오는 물론 TV에까지 광고공세를 펼쳐 시장에 두각을 나타냈다. 통상적으로 대다수의
광고의 역기능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 과장되고 왜곡된 광고는 소비자를 혼돈에 빠뜨리고 나아가 심각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히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이 같은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정직하고 확신을 가진 광고라면, 오늘날 같이 많은 제품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들에게 정당한 알 권리를 제공하는 훌륭한 정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변함없는 나의 생각이다.용각산에 이어 구심과 기응환이 나란히 성공을 거두면서 보령제약은 명실상부한 ‘생약전문 메이커’로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70년대로 넘어오면서도 용각산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거대 품목으로 시장에 진출해 있었고, 구심과 기응환 역시 ‘대표적인 심장약’과 ‘어린이용 만병통치약’이라는 인식 속에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이들 제품이 그 효능 면에서 널리 인정을 받은 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