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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ㆍ병원

노재영 칼럼/ 의대 증원,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와 질서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본격화되고 있다. 정부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최소 연간 700명 내외 증원이 필요하다고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와 전국 의대 교수단체, 전공의협의회는 잇따라 성명과 논평을 내며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환자·노동·시민사회는 증원 규모 축소나 지연이 반복될 경우 의료 공백이 구조화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 논의는 단순한 찬반 대립이 아니라, 우리 의료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료계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존중될 필요가 있다. 대한의사협회와 의대 교수단체, 전공의협의회는 의대 증원이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 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의사 수만 늘릴 경우 과잉진료와 의료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고, 교육 인프라와 수련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은 증원은 장기적으로 의료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지적은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들의 현실적인 우려다. 특히 교수단체와 전공의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해 온 교육 여건, 수련환경, 근무 강도 문제는 증원 논의와 분리해서 다룰 수 없는 핵심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계 역시 표면적으로는 "의사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의대 증원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초고령화와 인구구조 변화,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의 지속적인 인력 공백은 기존 체계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로 의료계 내부에서도 증원 자체를 전면 부정하기보다는, “어떤 규모가 합리적인가”, “어떤 속도와 질 관리 장치가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로 관심이 이동하고 있다. 연간 700명 내외 증원이라는 논의 역시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제기된 하나의 기준점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증원 논의가 여전히 숫자 공방에 머물며, 중장기적 로드맵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최근의 의료 공백을 통해 확인된 것은 단순한 인력 배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인력 부족의 위험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령 의사의 활동 지속이나 AI 기반 생산성 향상과 같은 가정이 증원 축소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이는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요소다. 과학적 추계와 현장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인 증원 계획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를 둘러싼 논쟁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의료계가 제기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와 교육의 질에 대한 우려는 타당하며, 정책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동시에 지역의료가 자율적 선택에만 맡겨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지역의사제는 의료인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지역 의료가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정책 수단이다. 이는 공공병원 역할 강화, 지역 2차 병원 기능 정상화, 공공정책수가, 팀 의료 인프라 구축과 병행될 때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이제 의대 증원 논의는 찬반을 가르는 단계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질서 있는 증원 계획을 어떻게 공동으로 설계할 것인가로 전환돼야 한다. 정부는 단기적 갈등 관리가 아니라 일관된 원칙과 제도 개혁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의료계는 현장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증원 규모와 속도, 질 관리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의대 증원은 의료개혁의 전부는 아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출발점이다.  의료계와 정부, 사회가 상호 불신을 넘어 공동 책임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와 국민 건강 향상이라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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